어머니 뒤를 이어 2대째 하는 일들
김의정 회장은 명원茗園 김미희(1920~1981) 여사와 성곡 김성곤(1913~1975) 쌍용양회 설립자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워낙 유명한 분들인데, 특히 어머니 김미희 여사는 일제에 의해 맥이 거의 끊겼던 한국 전통 다례의식을 복원하고 보급하는 데 평생을 바친 유명한 다인茶人이다. 어머니는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차에 관한 견문을 넓혔으며, 우리 차 발전을 위한 일에는 아낌없이 사비를 들여 지원했다.
“일제가 우리 차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여학교에서 일본 다도를 가르치는 등 만행을 저질렀어요. 우리 차문화가 일본 다도와 뒤섞여버렸죠. 어머니는 그걸 너무 안타까워하셨어요. 전통 다례 복원에 관해서라면 지방이고 어디고 발이 닳도록 다니셨어요. 순정효황후 윤씨와 김명길 상궁을 후원하면서 궁중다례를 배우고, 명원다회를 결성했어요. 대한민국 최초로 차문화학술대회(1979)도 열고, 세종문화회관에서 ‘한국전통의식 다례 발표회’(1980)도 개최했는데, 그 큰 행사에 발표할 연구자가 없어서 10년간 그분들 연구비와 생활비를 대주면서 전문가로 키웠어요. 아버지는 그런 큰 돈을 아무 말 없이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셨고.”
명원 선생은 1981년에 돌아가셨으나 그 공을 인정받아 2000년 보관문화훈장에 추서되었다.
어머니의 일을 김 회장이 물려받았다. 차茶한테 어머니를 빼앗겼다고 생각할 때는 차가 그리 쓰기만 했는데, 차를 제대로 알게 되고 나니 비로소 차 맛도 달게 느껴졌다고 한다.
차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부모님은 남에게 주는 걸 좋아하셨다. 불사에 보시하는 것에는 아까운 줄 몰랐다. 전국 사찰 어디를 가도 “어머니인 명원 보살이 무엇무엇을 불사했다”라면서, 김 회장을 반갑게 맞아주는 스님들이 있었다. 조계사에서 만난 한 스님도 명원 선생이 1970년경 신도회장 재임 때, 진흙투성이인 절 마당에 트럭 몇 10대 분량의 모래를 실어다가 뿌렸다고 전해주었다. 집안 살림하랴 차 연구하랴 그 바쁜 중에도 산속 절 불사까지 마다 않는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딸은 못내 궁금했다고 한다.
어릴 때 집에는 늘 손님들이 북적였다. 온갖 정치인이 드나들었고, 국회의원이던 아버지 지역구 사람들이나 차와 관련된 어머니 손님들도 꼬리를 물었다. 적게는 100여 명, 많을 때는 300명도 넘었다.
스님들도 많이 오셨다. 광화문 법련사에 상주하시던 법정 스님도 여러 번 뵈었다. 어린 남동생은 ‘공양’이라는 말을 하도 자주 들어서 ‘밥’을 ‘공양’으로 알고 자랐다. 객이 많다 보니, 쌀 1가마를 하루에 다 소비할 때도 있었다. 음식점 식당만큼 큰 부엌에는 끼니 때와 상관없이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가마솥 밥과 반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린 김 회장은 그때 가족끼리만 둘러앉거나 어머니와 둘이서만 받는 오붓한 밥상이 소원이었다.
명절 때 어머니는 집안일 해주는 사람들에게만 새 옷을 사주곤 했다. 자녀들이 투정을 부리면 “너희들은 매일 명절이 아니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산처럼 쌓아놓고 손님들과 함께 골라 신는 양말은 학교 갈 시간쯤이면 다 없어지기 일쑤였다. 어찌 보면 부모님은 일상이 나눔이었다. 부모님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김 회장의 삶도 나눔과 아주 친숙하다.
중앙신도회관 건립, 벅찬 보람 느껴
신도회장 소임을 맡은 소감은 어떨까?
“재밌어요. 신도들이 다 친구 같고 편해요. 보람이 있는 일이어도 재밌어야 자꾸 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즐겁게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내가 즐거워야 주위도 즐겁지요.”
깜빡 잊고 있었다. 모든 일은 즐겁게 해야 행복하다는 걸. 어떤 일에 굳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물 흐르듯 바람 불듯 자연스러우면 된다는 것을……. 김 회장은 26대 임원들이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화합하고 정진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은 중앙신도회 회장과 조계사 신도회장을 각각 두 차례씩 역임했다. 중앙신도회가 시기는 더 일렀지만 우연히 두 단체에서 똑같이 23대와 24대 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두 곳 다 재임 중에 신도회 사무실을 새로 마련했다.
중앙신도회의 경우, 조계종단 전체를 아우르는 전국 규모 조직의 중앙본부격임에도 불구하고 당시까지 독립된 건물이 없었다. 마땅히 새 회장단이 출범할 때마다 회관 건립을 최우선 숙원사업으로 삼았지만, 헛된 꿈처럼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자회견 장에서 김 회장이 그만 신도회관을 짓겠다고 공표하고 말았다. 그날의 회견 내용과 아무 관계도 없고, 준비한 발언도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임기 중에 신도회관을 짓겠다’라는 말이 툭 튀어나왔어요. 교계 기자들이 있는 공식석상이니만큼 주워 담을 수는 없었어요. 기자들은 갸우뚱하는 분위기였고, 저도 별다른 대책도 없이 돌발적으로 나온 말이었어요. 무척 당황했죠.”
물론 평소에 신도 조직의 구심점이 되는 공간으로서 신도회관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명원 선생의 생전의 바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데 조달할 방법은 없으니, 막연한 꿈과 같았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피 덕분인지 아니면 무르익은 시절인연 덕분인지,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술술 풀려서 의외로 2년 만에 신도회관(지금의 전법회관) 개관식을 하기에 이르렀다. 알 수 없는 힘이었다.
조계사 신도회 또한 독립 건물은 아니지만 ‘신도회 사무국’ 팻말을 걸고 어엿한 사무 공간과 회의 공간을 갖춤으로써 신도회 활동에 윤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사무처의 체계도 서서히 잡히면서 안정기를 향해 가고 있는 느낌이다.
스스로 찾은 수행, 다선일여
김 회장이 지난 임기 때 이뤄낸 성과로 꼽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조계사 경내에 ‘다실’을 마련한 것도 그 중에 하나다. 차와 불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신도회 회의나 모임을 차 한 잔 나누면서 하고, 그런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했는데, 다실이 마련됨으로써 그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잠시 어색해 하던 사람들도 시간이 갈수록 차 마시는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편안해지고 있다고 한다.
올해부터 사중에서 (재)명원문화재단과 업무협약을 맺음으로써 선재어린이집과 템플스테이 등에서 전통 다례 교육을 프로그램화하거나, 사중 행사와 법회의식을 통해 전통 다례법을 접하고 익힐 수 있게 되었다. 김 회장에게는 단비와 같은 소식이다.
김 회장은 차 마시는 것도 불교수행의 하나로 생각한다. 차를 마시기 위해 다기를 준비하고, 물을 끓이고, 차를 우려내어 잔에 따르고, 나누어 마시는 하나하나의 섬세한 동작과 순간순간의 과정이 곧 명상이며 선의 경지와 같다고 생각한다. 다선일여茶禪一如의 경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차 교육은 어릴 때부터 해야 한다는 게 제 신념이에요. 인성교육이고 예절교육이기 때문이죠. 두 손으로 차를 올리려면 공경심과 정성, 배려심이 있어야 해요. 어린이 정서와 건강, 인성교육에 다례茶禮만한 것이 없습니다.”
김 회장이 교육부 산하의 인성교육진흥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건 그 때문이다. 모름지기 차의 선한 영향력이 교육 분야에서도 이미 중시되고 있다는 증거다.
어릴 때 수녀가 되고 싶었다는 김의정 회장. 수녀의 삶이 멋있어 보여서다. 하지만 불심 깊은 어머니 영향을 받아 40세를 넘기면서부터 불교가 진심으로 좋아졌다. 자신도 모르게 불교가 이미 몸에 배어 있었다. 기도할 때 더 부처님 가까이로 가고 싶던 욕심은 사그라들고, 남의 마음이 헤아려지고,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약골이던 몸도 점차 건강해졌고, 마음도 밝아졌다. 비로소 ‘절에 다녀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냥 어머니를 따라다니던 때와는 뭔가 다른 느낌이라고 한다.
어머니 명원 선생의 삶처럼, 차와 불교를 삶의 최고 가치로 삼고 있는 김의정 회장. 지난 2020년 가을, 코로나19의 와중에도 ‘제25회 명원세계차茶박람회’와 더불어 명원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을 열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풀어냈다. 한국 전통 다례에 대한 뜨거운 사명감 때문에 김 회장의 노년은 꽃보다 더 곱다.
김의정 신도회장은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7호 궁중다례 보유자로서, 차에 관한 서적을 30여 권 펴냈다. 《한국 차문화 천 년의 숨결》(차의 세계, 2020), 《시대를 이끈 휴머니스트》(학고재, 2011), 《명원 김미희-차의 선구자》(학고재, 2010), 《차와 더불어 삶》(명원문화재단, 2007), 《명원생활다례-한국다도종가 전통다례법》(명원문화재단, 200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