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조계사 뉴스

조계사보 칼럼

[연재완료] 백성호의 국수가게

멀리하기엔 너무 가까운 당신

  • 입력 2021.03.01

한 그릇

 

독일 출장을 간 적이 있습니다. 차를 타고 숙소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숲 속으로 난 도로를 몇 시간째 달렸습니다. 동행하던 사람은 “지금 세계에서 제일 잘나가는 기업이 BMW와 메르세데스 벤츠, IBM 등이다. 그런 회사에서 직원 세미나를 할 때 선택하는 숙소다. 가장 고급스러운 숙소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은근, 궁금해지더군요. ‘얼마나 멋지고 화려한 곳이면 그런 초일류 기업에서 회사의 세미나 숙소로 정하는 걸까?’ 차를 타고 가는 내내, 그런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습니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수백 년 전에 지은 듯한 커다란 저택이 한 채 있었습니다. 저택 주위는 온통 나무와 숲뿐이었습니다. ‘내부는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할까?’ 안으로 들어가 방을 배정받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이었습니다. 방은 아주 심플했습니다. 1인용 작은 침대와 작은 책상, 간단한 옷걸이. 그게 전부였습니다. 커다란 벽걸이 TV요? 아니요, TV가 아예 없었습니다. 전화기도 없고, 인터넷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외부와 연결이 거의 차단됐습니다. 

 

숙소 카운터에 갔더니 “숙박자는 핸드폰을 모두 맡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게 이 숙소의 운영 콘셉트였습니다. 그렇게 다 맡기고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순식간에, 심심해졌습니다. 방안에서 별로 할 게 없더군요. 주위를 찬찬히 둘러봤습니다. 방과 벽에는 별다른 장식도 없더군요. 그냥 흰 벽이었습니다. 그리고 조그만 전등 하나가 천장에 대롱대롱 달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두 그릇

 

“세상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숙소”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와서 보니 제 예상과 딴판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이게 왜 세상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숙소일까?’ 그 이유를 찬찬히 짚어봤습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저는 “아~!”하고 작은 탄성을 질렀습니다. 

 

전날 밤, 저는 처음에 아주 무료했습니다. TV도 없고, 인터넷도 안 되니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일에 대한 사색과 명상이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건 숙소의 작고 소박한 방이 저에게 소리 없이 건네는 선물이었습니다. 

 

 

 
저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저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창밖에는 밤하늘의 별이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그 방에서 저는 ‘진정한 고급스러움’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뜻밖에도 그건 소박함과 연결돼 있었습니다. 정말 소박한 것과 정말 고급스러운 것, 둘은 그렇게 통했습니다. 저는 명품의 새로운 버전을 발견한 기분이었습니다. 
  
세 그릇
 
프랑스의 떼제에는 ‘떼제 공동체’라는 수도원이 있습니다. 특정 교단이나 교파에 소속되지 않은 초교파 수도 공동체입니다. 그곳에 사는 한국인 수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신한열 수사와 인터뷰를 하다가 ‘소박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소박하다는 건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다. 꼭 필요한 것만 있는 거다. 소박함을 통해 우리는 전에 안 보이던 것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게 뭡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창조의 아름다움, 창조의 신비”라고 답했습니다. 불교식으로 풀면 ‘자연의 신비, 존재의 신비, 법신(法身)이 화신(化身)으로 드러나는 신비’가 됩니다. 
 
정말 소박한 건 꼭 필요한 것만 있는 거라 했습니다. 그런데 꼭 필요한 것들은 사실 공짜로 주어집니다. 우리가 바람과 햇살을, 비와 공기를 돈 주고 사지는 않으니까요. 신 수사가 했던 말 중에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습니다. “땅이나 건물이 있어야만 자연의 아름다움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한강변의 억새를 봐라. 그냥 주어진다.”


맞습니다. 한강변의 억새, 오늘 오후의 겨울 햇살은 그냥 주어집니다. 그렇다고 그런 신비를 모든 사람이 다 누리는 건 아닙니다. 억새와 바람과 햇살에 담겨 있는 아름다움, 그 신비로움을 맛보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맞습니다. ‘소박함’입니다. 우리가 각박하게 쫓기며 살 때는 억새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바람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맛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뿐입니다. 
 
네 그릇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나라’를 서방정토(西方淨土)라고 표현합니다. 아미타불이 상주한다는 이상 세계입니다. 한 마디로 ‘극락’입니다. 지극한 즐거움으로 가득한 피안의 세계입니다. 하늘에서는 음악이 들리고, 땅은 황금빛으로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낮과 밤, 세 차례씩 천상에서 꽃들이 떨어집니다. 서쪽 끝, 그 너머의 너머로 가면 이 나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가 바로 서방정토입니다. 
 
‘서방(西方)’이라 칭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동쪽을 향해서 섰을 때 앞은 과거, 뒤는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서쪽은 미래를 상징합니다. 서방정토는 먼 훗날 가게 될 이상세계를 뜻합니다. 
 
그런데 깨달음을 성취한 불교사의 역대 선사들은 달리 말합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여기가 바로 불국토”라고 말합니다. 지극한 즐거움은 서쪽 끝의 언덕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서있는 지금 여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운문 선사는 “날마다 좋은 날”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니, 날마다 지지고 볶는 사바세계가 어떻게 서방정토인가. 다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고급스러움’을 다시 정의하면 어떻게 될까요. 고가(高價)의 화려함보다 무가(無價)의 소박함이라는, 고급스러움의 새로운 버전을 내가 수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강가의 억새, 아침의 햇살, 귓가를 스치는 바람, 거리의 나무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이 모두에 존재의 신비가 있구나.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법신(法身)이 이 모두로 화(化)해서 나타나는 거구나. 그러니 이들 모두가 부처구나. 내가 사는 이 땅에는 오직 부처만 있구나. 그외에 달리 아무것도 없구나.   
 
부처만 사는 땅, 거기가 어디일까요. 그렇습니다. 불국토입니다. 꿈에도 그리던 서방정토입니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란 가요가 있잖아요. 그런데 불국토는 ‘멀리하기엔 너무 가까운 당신’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새들이 지저귀고, 꽃들이 피어나고, 도로에서 자동차 소리가 빵빵거리니까요.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진정한 고급스러움이란 무엇일까. 그런 소박함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 어찌 될까. 결국 서쪽 끝 언덕 너머의 불국토를 찾는 일이 아닙니다. 내 주위에 이미 와있는 불국토를 찾는 일입니다. 


-----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저서 『생각의 씨앗을 심다』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만약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이제, 마음이 보이네』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저작권자 © 미디어조계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