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요. 부끄러운 짓인 줄 알았다면 당장 멈추었겠지요.”
부처님이 그런 아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보살님”
“예”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러게요. 이런 저런 일로 안달복달하고, 이럴까 저럴까 우왕좌왕하고, 이러면 어쩌나 저러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던 많은 일들이 떠오르네요. 그 모든 게 저의 부질없는 욕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후회가 많이 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런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 그것을 참괴(慙愧)라고 합니다. 늦가을 찬바람이 휘몰아치면 온 마당에 낙엽이 수북하듯, 우리 마음에 욕망의 바람이 불고 나면 수많은 불순물이 남게 됩니다. 보살님에게 일어난 그 부끄러움은 온갖 잡동사니가 너부러진 마당을 청소하는 빗자루와 같습니다. 빗자루로 마당을 쓸듯 그 부끄러움을 잘 운용하면 보살님 마음의 뜰은 새로운 풍경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아내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싱긋이 웃었다.
“맑고 깨끗하게요?”
부처님도 따라 한쪽 눈을 찡긋하셨다.
“그걸 고상하게 표현하면 청정(淸淨)이라 하지요.”
비밀스러운 암호라도 주고받는 듯한 둘의 모습에 곁에서 지켜보던 남편까지 셋이서 한꺼번에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한참을 깔깔거리다가 남편이 물었다.
“부처님, 욕심내고 다투고 원망하고 괴롭히고 또 스스로 괴로워하는 그 욕망의 바탕을 가만히 돌이켜보면 거기에는 늘 ‘나’라는 자의식(自意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부처님 가르침 덕분에 그런 생각과 감정이 ‘나’라는 것이 전제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생기고 또 사라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생각과 감정의 물결만 끝없이 일렁일 뿐 그 물결을 일으키는 특정한 ‘나’는 없더군요. 하지만 부처님, 자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건 참 난감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저의 이런 앎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너무도 쉽게 생각과 감정의 포로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끝없이 생멸(生滅)하며 파란을 일으키는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 환하게 웃으셨다.
“매우 놀랍고 또 반가운 질문입니다. 거사님이 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셨군요.”
남편이 빙긋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엇비슷하게나마 이해한 정도지요.”
그때 곁에 있던 아내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남편에게 물었다.
“생각과 감정의 물결만 일렁일 뿐 그 물결을 일으킨 ‘나’는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이야? 세상사람 모두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느낀다.’하고 말하잖아. 만약 ‘나’가 없다면 개개인을 구별하는 정체성이 무너지는 것 아니야?”
남편이 눈빛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망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부분이야. 다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너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또 생각하지. 다들 막연하게 느끼고 있는 ‘나’라는 그 정체성, 자기 동일성이 근거가 분명한 생각이라고들 여기지. 하지만 찬찬히 관찰해 보면 그것이 ‘그렇게 생각할 뿐’인 거야.”
곁에서 듣던 부처님께서 손뼉을 치며 웃으셨다.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그 말씀 참 좋군요.”
부처님의 맞장구에 신이 났는지 남편의 목소리에 한층 힘이 붙었다.
“예, 정말 그렇습니다. 찬찬히 관찰해보면 이런 저런 조건과 환경, 즉 인연 따라서 아주 짧은 순간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각과 감정이 스쳐 지나갑니다. 하지만 다들 그 모든 생각과 감정을 다 일일이 거론하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느낀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렇게 자각(自覺)하지도 않고요. 그 가운데 어느 특정한 생각과 감정을 고집할 때, 꼭 그럴 때만 그 앞에 ‘나’라는 단어를 붙이지요. 그러니 그 개개인의 정체성, 자기 동일성이라는 것은 사실 집착하는 유형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부처님께서 되물으셨다.
“집착하는 유형의 차이라고 하셨나요? 좀 더 쉬운 말로 설명해 줄 수 있을까요?”
“쉽게요? 아, 습관(習慣)이라고 표현하면 되겠군요. 생각의 습관, 감정의 습관, 언어의 습관, 행동의 습관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이라 여기지요.”
곁에 있던 아내가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휴 나는 그 말도 어렵네. 좀 더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 봐요.”
남편이 빙긋이 웃으며 아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럴까? 당신 앞에 장미꽃과 제비꽃이 있어. 당신은 어느 꽃이 더 좋아?”
“음~ 나는 제비꽃”
“다른 사람들도 다 장미꽃보다 제비꽃을 좋아할까?”
“그렇지 않지.”
“그럴 때 ‘제비꽃을 좋아하는 나’와 ‘장미꽃을 좋아하는 너’를 구별하고, 이어서 ‘나와 너는 달라, 즉 나는 너와 다른 존재야’라고 느끼지?”
“그렇지.”
“그걸 돌이켜 잘 생각해 봐. 만약 ‘장미꽃보다 제비꽃을 좋아하는 나’라는 실체가 정말 존재한다면 그 ‘나’는 항상 장미꽃보다 제비꽃을 좋아해야만 할 거야. 즉 현재뿐 아니라 과거에도 미래에도 반드시 장미꽃보다 제비꽃을 좋아해야만 하지. 하지만 과연 그런가? 당신은 50년 전에도 장미꽃보다 제비꽃을 좋아했어?”
“그땐 갓난쟁이인데 꽃이 뭔지도 몰랐지.”
“아마 유난히 제비꽃을 좋아하게 된 어떤 특별한 경험이 있었을 거야. 당신은 30년 후에도 반드시 장미꽃보다 제비꽃을 좋아할까?”
“그건 장담할 수 없지.”
“바로 그거야. 당신이 ‘나는 장미꽃보다 제비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자기만의 정체성을 느끼지만, 사실 그런 느낌과 생각은 특정한 경험에 바탕을 둔 감정의 습관일 뿐이야. 습관이 된 감정은 오래 지속되고, 또 다른 감정들을 억누르고 지배하는 힘이 있지. 하지만 그것 역시 고정된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니야. 그렇지?”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왜 ‘정체성, 자기 동일성이 없다’고 말했는지 이해하겠군.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어서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과 행동 가운데 습관화되어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생각과 감정과 행동이 ‘나’라는 관념을 만든다는 것이지?”
곁에서 듣던 부처님께서 또 손뼉을 치며 기뻐하셨다.
“보살님은 거사님보다 더 이해가 빠르시군요. 자, 그럼 이제 제가 두 분 말씀을 종합해서 한번 말해 볼까요?”
아내와 남편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예, 부처님.”
“우리의 마음마당에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는 달갑지 않은 감정과 생각들은 욕망의 바람이 휘젓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불순물들입니다. 애초에 욕망의 바람이 불지 않았다면 그런 쓰레기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 그 욕망의 바람은 어디에서 일어났을까? 관찰해보면 그 바람의 진로와 강도를 결정하는 것은 ‘나’라는 자의식(自意識)임을 알게 됩니다. 만약 그 ‘나’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 바람은 끝내 잦아들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 ‘나’에 해당하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생각과 감정과 행동 등의 습관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두 분이 이해하신 바와 일치합니까?”
“예, 부처님.”
“그럼. 한발 더 나아가 묻겠습니다. 좋은 습관이라면 제어하거나 제거할 필요가 없겠지요. 하지만 온 마당을 헤집어 쓰레기더미로 만드는 습관이라면 그 강력한 힘을 제어하고 누그러뜨리고 또 제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습관을 다스릴 수 있을까요?”
남편이 합장을 하며 여쭈었다.
“부처님, 그것이 제가 부처님께 여쭈고자 하는 바입니다.”
부처님께서 진중한 낯빛으로 말씀하셨다.
“습관을 다스리려면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과 감정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걸 저는 수행(修行)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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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헌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현재 동국역경위원. 한국불교전서 번역위원. 조계종 간행 <부처님의 생애>, <청소년 불교입문> 집필위원으로 참여. 저서로 <커피와 달마>, <붓다를 만난 사람들>, <육바라밀>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