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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의 어머니
구르는 낙엽만 봐도 까르르 웃음이 나오던 처녀 시절, 마냥 즐겁게 직장을 다니던 어느 해 여름날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전화를 받고 정신없이 달려가 병원 응급실로 모시게 되었다. 다행이 며칠 후 회복이 되셨고마침 다인실은 자리가 없어 2인실로 옮기게 되었다.
그때 아버지는 가게를 보느라 바쁘시고 오빠는 직장에 다니고 남동생은 군에 복무중이어서 어머니의 간호를 내가 하게 되었다. 그날부터 병실 한편에서 자면서 직장(은행)을 다니게 되었다.
당시 은행 여직원은 결혼하면 사표를 내야해서 평사원으로만 근무했는데, 마침 5년 이상 다니는 조건으로 승진할 수 있는 시험 기회가 주어져 퇴근하면 병원으로 가서 공부를 하며 어머니의 간호를 하였다.
그때 2인실에 함께 입원해 계시던 환자분과 어머니가 성향도 비슷해서인지 도란도란 이야기도 많이 나누시며 급속히 친하게 지내셨다. 급기야 “우리는 서로 딸, 아들이 있으니 짝을 맺어줍시다.” 하여 나는 어머니 병간호를 하다가 졸지에 선을 보게 되었다.
어머니께서 병원에서 퇴원하시고 3개월 후, 스물다섯 살 첫눈이 내리는 날 결혼을 하였다.
시댁에서는 혼수준비 할 것도 없다 하시며 집, 패물, 심지어 시댁에 드리는 예단까지 모두 장만해 주셨다.
친정어머니는 내가 둘째 아이를 낳고 백일도 되지 않아 결국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다.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냥 눈물이 흐른다. 어머니는 너무나 가족을 위해 헌신하셨던 관음보살이셨다. 어머니는 우이동에 있는 도선사에 다니셨는데 절에 같이 가자고 할 때마다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놀러 다니기에 바빴다.
시댁은 몇 대 위 조상님 중, 절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후 대를 잇는 아들을 얻고 나서 철저하게 절에 다니는 독실한 불자집안이었다. 시어머님께선 내게 절에 같이 가자고 강요나 권유조차 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다녀오시곤 했다. 절에 가시는 날엔 꼭 목욕재계하시고 곱게 한복으로 갈아입으셨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정갈하고 단아하신지 뭔가 범접할 수 없는 근엄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초파일이나 백중, 차례를 지내는 설날과 추석날엔 나도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갔는데 처음엔 다소 낯설었던 절의 분위기가 차츰 편안하게 다가오면서 자연스럽게 젖어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부처님은 어떤 분이실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첫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 때, 늘 시어머니께서 해 주시던 아이들 기도를 직접 하기로 마음을 먹고 가까운 조계사에 백일기도를 올렸다. 그렇게 조계사와 인연을 맺은 후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어 기본교육부터 시작해서 불교대학과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고 지금은 포교사 활동까지 하게 되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깊은 진리를 내 어찌 알 수 있을까. 그러나 하나하나 차츰차츰 알아가면서 할 수 있는 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게 생활하려고 정진하고 있다.
올해 98세이신 시어머니께서는 거동이 불편하셔서 절에 가시지 못하신다. 가끔 전화로 “지금 어디니?” 물으시면 “네. 어머니 조계사예요.” 하고 대답하면 무척 좋아하신다.
부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연을 맺어주신 두 분 어머니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나 또한 나의 아이들과 손녀들이 불자가 될 수 있도록 조용히 그러나 부단하게 불연을 만들어 가고 있다.
김윤옥 (혜안수, 신도회 포교본부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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