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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원명스님의 마음산책

밀린다왕문경(4)

  • 입력 2021.04.01

이번에는 불교에서 가장 전통적이고 중요한 물음인 무아설과 윤회설 사이의 관계설정에 대한 것입니다. 가장 일반적인 논란의 형태는 무아설과 윤회설이 상호 모순적이라는 주장과 양립이 가능하다는 두가지 주장 사이에서 논란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밀린다왕문경을 통하여 무아설은 윤회의 관념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부분을 설명했습니다.

 

왕은 물었다. 

나가세나 존자여, 살아있는 자와 죽은(死滅) 자는 동일합니까, 또는 다릅니까.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습니다.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일찍이 갓난애였고, 유약한 애였고, 꼬마였고, 등에 업혀 있었습니다. 어릴 적 그대가 어른이 된 지금 그대와 같습니까. 

아닙니다. 어릴 적 나와, 지금 나와는 다릅니다. 

만일, 그대가 그 어린애가 아니라면, 그대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또 선생도 없었다는 것이 됩니다.  어릴적 어머니와 어른이 되었을 적 어머니가 다릅니까. 지금 배우고 있는 자와 

이미 배움을 마친 자가 다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란 존재는 분명히 어려서 성장하여 어른이 되고 결국 늙게되고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과정를 잘 살펴보면 5세때, 10세때, 30세때, 50세때, 80세때의 모습은 각각 다르지만 나란 존재의 인식은 동일시 합니다. 

그렇기에 나가세나 스님께서는 실체가 없으면서도 연속성이 가능하다는 즉 무아와 윤회의 양립성을 인정되는 표현을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인도인의 사고방식중에 언어로 흔하게 사용하고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표현되는 말이 노 프라블럼(No Problem)입니다.

인도를 여행하는 동안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고, 언제 어디서 어떤 문제가 생겨도 인도인들은 노 프라블럼이라 합니다.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도 이미 살아났으니 노 프라블럼인 것입니다. 오토바이와 자동차 접촉사고가 나도 오토바이 운전자가 일어나서 걷게되고 다시 운전해서 갈수 있으면 그것으로 노 프라블럼. 즉 “살았으면 된 것이지 더 이상 무엇이 문제야.” 라는 인도인의 사고방식입니다. 하지만 그 사건 상황속으로 들어가서 인도인들의 그 말을 듣는 그 순간에는 어떻게 이런 상황중에 이런 대답을 태연하게 할수 있는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그 소리 노 프러블럼(No Problem)입니다.  

예화를 소개하자면 인도성지순례를 다녀온 분이 쓴 글인데 그분은 기차역에 도착해 열차를 기다려야 했던 일을 소개했습니다. 일반열차라면 이해하겠다. 그러나 일종의 전세열차인 ‘대반야열차’는 사정이 다르다. 열차는 역사 인근에 정차해 있다가 우리가 올 시간에 맞춰 플랫폼으로 나오기만 하면 된다. 열차에서 내려 인근 성지를 둘러본 후 다시 열차가 있는 역으로 돌아가는 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매번 열차를 기다렸다.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기도 했다.

 

기타를 타려고 줄서있는 인도 사람들

기타를 타려고 줄서있는 인도 사람들


“열차는 왜 안 오죠?” “지금 오고 있다.” “아니 왜 열차가 늦는 거예요?” “노 프라블럼(No Problem). 걱정하지 마라. 지금 오고 있으니까.” 분명 문제가 많은 상황인데도 태평스럽게 ‘문제없다’는 반응이다.

뿐만 아니다. 식사시간, 스프를 내오면서 스푼도 가져오지 않는 웨이터에게 “스푼은 왜 주지 않느냐?”고 물어도 대답은 언제나 ‘노 프라블럼’. “노 프라블럼. 주방에 가면 스푼이 많다. 조금 있다 가져다 주겠다.” 그리고는 깜깜무소식. 할 말이 없다. 그것이 인도다.

어떤 여행작가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어느 소매치기는 말했다. “당신이 무슨 이유로 이것이 당신 소유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잠시 이것을 갖고 있을 뿐이다. 주인이 모자를 벗어 잠시 벽에 걸어놓았다고 해서, 그 모자가 벽의 소유란 말인가?” 인도인들은 논리학에 달통한 사람들 같았다.

여자 거지가 나에게 말했다. “때로는 주고 싶을 때 줄 수 있는 것도 큰 행복인데, 나는 주고 싶어도 줄 게 없는 것이 안타깝다.” 그 소리를 듣고 어찌 동전 몇 푼을 내놓지 않을까.

“왜 인도 사람들은 부지런히 일하지 않느냐?”고 행인에게 묻자, “당신들은 왜 쉬지 않느냐?”고 대꾸하여서 할 말을 잃었다.

인도인의 사고 속에는 문제도 아닌 것에  왜 당신은 그렇게 열을 내는 것인가? 노 프라블럼.
사소한 문제를 왜 이렇게 문제시하는가? 노 프라블럼.
너는 아직도 숨을 쉬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노 프라블럼.

다시 밀린다왕문경으로 돌아와서 무아와 윤회에 관한 얘기를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주십시오. 
여기 어떤 사람이 등불을 켠다고 합시다. 그 등불은 밤새도록 탈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이여, 초저녁에 타는 불꽃과 밤중에 타는 불꽃이 같겠습니까. 
아닙니다. 
또, 밤중에 타는 불꽃과 새벽에 타는 불꽃이 같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초저녁의 불꽃과 밤중의 불꽃과 새벽의 불꽃은 각각 다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불꽃은 똑 같은 등불에서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대왕이여, 인간이나 사물의 연속은 꼭 그와 같이 지속됩니다. 생겨나는 것과 없어지는 것은 별개의 것이지만,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지 않고 동시에 지속(순환)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존재는 동일하지도 않고 상이(相異)하지도 않으면서 최종 단계의 의식에로 포섭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우유가 변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짜낸 우유는 얼마 후엔 응유(凝乳)가 되고, 다음엔 버터가 되고, 그 다음엔 버터기름으로 변해 갑니다. 만일 우유가 응유나 버터나 버터기름과 똑 같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대왕은 그 말이 옳다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유로부터 만들어진 것입니다. 
대왕이여, 인간이나 사물의 연속은 꼭 그와 같이 지속됩니다. 생겨나는 것(生)과 없어지는 것(滅)은 별개의 것이지만, 서로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지 않고 동시에 지속됩니다. 이리하여 존재는 동일하지도 않고, 상이하지도 않으면서 최종 단계의 의식에로 포섭되는 것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나가세나 존자여.


 

원명스님 (조계사 부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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