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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전스님의 새로운 신행이야기
질문 :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설악산 봉정암을 다녀왔습니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언제 봉안되었는지 궁금하고 사리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사리란 범어(梵語) 사리라(Sarira)를 음역한 말입니다. 원래의 뜻은 신체, 육신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유골, 영골(靈骨)의 뜻도 있습니다. 부처님의 육신을 화장한 뒤 나온 작은 구슬 모양의 결정체가 그것입니다. 크기도 여러 가지이고 색깔도 황금빛, 검은빛, 붉은빛 등의 오색(五色)이 뒤섞인 영롱한 빛깔을 띠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입멸(入滅)하시고 나서 장례는 부처님의 유훈(遺訓)에 따라 재가 신자들에 의해 치러졌습니다. 경전에 의하면 화장을 치르고 난 뒤 남은 유골과 사리를 수습하니 8말 8되가 나왔답니다. 정확한 도량형을 알 수 없어서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상당히 많은 양의 사리가 나온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유골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부처님의 입멸 소식을 전해 들은 여러 나라에서 각각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유골을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지요. 일부 국가에서는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사리의 분배를 요구했습니다.
결국 그 자리에 사신으로 참여했던 ‘도나’라는 분의 중재로 여덟 나라에 사리가 배분되고 이것으로 탑을 세워 공양하도록 했는데 이 탑들을 근본8탑(根本八塔)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사리를 담았던 병으로 만들어진 9번째 탑, 이어 다비식에 나왔던 재로 만든 10번째 탑이 초기에 존재했던 사리탑의 모습입니다.
탑은 그 후에도 계속 만들어졌는데 부족한 사리 대신 의발(衣鉢), 족적(足跡) 등으로 탑을 만들기도 했고 나중에는 경전과 불상도 봉안하게 되었습니다. 불교에 깊이 귀의했던 인도의 아쇼카 대왕은 나중에 근본8탑을 해체합니다. 그리고 부처님 사리를 8만 4천 개로 나누어 많은 곳에 탑을 세웁니다.
그 후로 불자들은 사리탑을 부처님으로 여기며 가장 경건하고 엄숙하게 공양을 해왔습니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는 당나라 현장(玄奘)스님이 150과를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져왔고, 역시 당나라 의정(義淨)스님이 300과를 모셔왔다고 전합니다. 우리나라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스님이 당나라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정골(頂骨) 100과를 모셔와 황룡사, 통도사 등에 봉안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리를 최초로 봉안한 탑은 황룡사의 대탑으로 알려져 있지만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불자님이 질문하신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 -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은 이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지칭합니다.
연관해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예전에 삼성문화재단에서 소유하고 있었던 현등사 사리와 사리함의 반환 문제로 불교계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또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사리를 모신 사리병과 금제(金製) 사리함 등의 사리장엄구 일체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불교계로 이관하는 문제를 가지고 다시 정부와 불교계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리나 사리함은 문화재가 아닙니다. 거래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대상입니다. 부처님의 사리는 곧 부처님의 육신이자 불교에서 공경하고 예배하는 성보(聖寶)입니다. 부처님의 법체(法體)를 상징하는 숭고한 예배 대상이지요. 조각이나 회화형식의 불상과 탱화 같은 성보와는 성격이 매우 다릅니다. 표현하기가 그렇지만, 불상과 탱화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문화재 성격의 성보라면 사리는 육바라밀(六波羅密)과 삼학(三學)의 수행에서 얻어지는 한량없는 공덕으로 만들어진 영적인 유골이자 청정한 정신의 결정체입니다.
오래전부터 불자가 진신사리를 찾아 참배하는 것은 부처님을 친견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탑 신앙도 함께 활발해졌습니다.
같은 의미로 진신사리를 모신 곳에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남전스님 (조계사 선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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