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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백성호의 국수가게

달마 대사의 한마디에 왜 마음이 편안해졌을까

  • 입력 2021.05.01

한 그릇

 

달마 대사는 인도 사람입니다. ‘달마도’를 보면 눈이 부리부리하고 이국적으로 생겼잖아요. 그가 인도인이기 때문입니다. 달마는 석가모니 부처에게서 내려오는 깨달음의 맥을 이었습니다. 그리고 인도를 떠나 중국으로 갔습니다. 사람 사는 땅에 깨달음의 이치를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중국 땅에서 대(代)를 이어 법을 전하려면 제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죽어도 법은 이어지니까요. 달마는 소림사 위의 동굴에서 9년간 면벽수도하며 제자를 기다렸습니다. 눈이 펄펄 내리는 날, 신광이라는 40대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혜가’라는 법명을 받고 달마의 제자가 됐습니다. 하루는 혜가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출가 당시 혜가는 마흔 살이 훌쩍 넘었습니다. 도교에도 일가견이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바깥 세상에서는 ‘똑똑한 사람’으로 통했던 겁니다. 그런데 달마와 함께하는 마음공부에서는 원하는 만큼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나이는 들어가고, 마음은 급한데, 진도는 느린 겁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했을까요. 그래서 스승에게 물었던 겁니다. 불안해 죽겠습니다. 달마 대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럼 내가 너를 편안하게 해주겠다.”

 

그 말을 듣고 혜가는 무척 기뻤습니다. 내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이 불안을, 스승 앞에 내놓기만 하면 없애준다니 말입니다. 즉시 혜가는 불안한 마음을 찾았습니다.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는 마음. 방금 전까지 나 자신을 구석으로, 구석으로 몰아넣던 마음. 그걸 찾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내가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막상 손으로 쥐려니까 잡을 수가 없습니다. 불안함이 있던 정확한 위치도 모르겠고, 불안함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양도 모르겠고, 불안함을 쥘 수 있는 손잡이도 보이질 않습니다. 방금 전까지 틀림없이 있었는데, 나를 콕콕 찔렀는데 말입니다. 당황한 혜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리 마음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솔직하게 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안의 덩어리를 잡고서 ‘툭!’하고 내놓아야 스승이 없애줄 텐데, 그러질 못하겠으니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달마 대사가 한마디 했습니다. 

 

“네 불안이 이미 없어졌느니라.”

 

 

달마와 혜가


두 그릇

 

불가(佛家)에서는 이 일화를 ‘안심(安心) 법문’이라 부릅니다. 편안할 안(安)자에 마음 심(心)자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을 편안케 하는 법문’입니다. ‘혜가의 마음이 불안했고, 그 마음을 편안하게 했으니 안심 법문이구나.’ 이렇게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훨씬 더 깊은 이치가 숨어 있습니다.  

 

혜가는 “마음이 불안하다”고 했습니다. 그게 혜가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혜가에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마음이 화가 납니다” “마음이 우울합니다” “마음이 외롭습니다” “마음이 괴롭습니다” “마음이 황홀합니다” “마음이 슬픕니다” 잠시만 짚어봐도 알 수 있습니다. 혜가의 물음이 곧 우리의 물음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러니 혜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달마에게 물은 셈입니다. “이 불안하고 괴롭고 슬프고 아픈 마음을 어떡해야 합니까?”

이 물음에 달마는 달콤한 위로를 건네지 않았습니다. “아프니까 인간이다” “불안하니까 사람이다” “누구나 다 그렇다” “그게 인생이다” 이런 식으로 쓰다듬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런 식의 위로를 통해서는 뿌리를 뽑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만약 달마가 혜가를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고, 다독여줬다면 어땠을까요. 며칠 안가 혜가의 불안은 다시 올라왔을 겁니다. 그럼 달마는 또 안아주고, 며칠 안가 혜가는 또 불안을 호소했을 겁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끝이 없을 겁니다. 그렇게 오르락 내리락 하다가 일생을 다 보내겠지요.  

 

그런데 달마의 대응은 달랐습니다. 어떠한 위로도, 포옹도, 쓰다듬음도 없었습니다. 대신 곧바로 정답을 들이밀었습니다. “네 불안이 이미 없어졌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또 궁금증이 생깁니다. 이게 왜 정답이 되는 걸까요? 그 말을 듣고 혜가의 불안은 왜 사라졌을까요? 

  

 

 

세 그릇

 

달마 대사가 설한 ‘안심 법문’에서 ‘심(心)’에 주목해야 합니다. 마음(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마음은 비단 불안한 마음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슬픈 마음, 기쁜 마음, 아픈 마음, 즐거운 마음 등. 우리가 살면서 체험하는 모든 마음을 일컫는 겁니다. 

 

이 마음을 따라가며 우리의 삶도 출렁입니다. 때로는 폭풍우가 치고, 때로는 쓰나미가 몰려 옵니다. 때로는 태양 아래 잔잔한 수면을 보며 즐겁기도 하고, 때로는 달빛 아래 찰랑대는 파도 소리에 기쁘기도 합니다. 삶에 몰아치는 파도의 강도와 크기에 따라 우리는 오르락 내리락, 출렁출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달마 대사는 “파도의 정체를 깨달으라”고 말합니다. 불안한 파도, 성난 파도, 기쁜 파도, 아픈 파도, 즐거운 파도. 그 모든 파도의 정체를 똑바로 보라고 말합니다. 그걸 일깨우기 위해 혜가에게 “너를 불안하게 하는 파도를 꺼내보아라”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혜가는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파도를 거머쥘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빛이나 그림자, 구름 같은 것들은 손으로 잡을 수가 없잖아요. 마음의 파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손으로 잡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고요? 본래 ‘덩어리’가 없으니까요. 본래 비어있으니까요. 달마는 그러한 파도의 정체를 보라고 한 겁니다. 

 

달마도

네 그릇
 
현대 과학의 최첨단이 양자 역학입니다. 양자 역학이 제시하는 가장 큰 물음이 있습니다. ‘파동인가, 입자인가’.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세계와 이 우주에 대해 양자물리학은 ‘파동인가, 입자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파동이라면 덩어리가 없는 거고, 입자라면 덩어리가 있는 겁니다. 
부처님은 2600년 전에 이미 여기에 답을 내놓았습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안한 마음이 하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따집니다. “‘편안’과 ‘불안’은 서로 반대인데,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과 달마 대사는 ‘편안한 마음과 불안한 마음’에서 편안과 불안이 아니라 ‘마음’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성난 파도와 잔잔한 파도는 서로 반대지만, 파도의 정체는 하나이니까요. 
 
“네 불안이 이미 없어졌다”는 달마의 한 마디에 혜가는 그걸 깨쳤습니다. 마음의 정체를 본 겁니다. 그걸 봤더니 비로소 안 겁니다. 세상 모든 파도가 바다와 한 몸이구나. 그래서 성난 파도, 짜증나는 파도, 불안한 파도를 이제 바다로 대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진정한 ‘편안함’이 밀려 옵니다. 그게 달마가 설한 ‘안심 법문’입니다.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저서 『생각의 씨앗을 심다』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만약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이제, 마음이 보이네』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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