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조계사보 칼럼
조주 선사는 왜 “나는 부처가 아니다”라고 말했을까?
한 그릇
유가(儒家)의 한 선비가 조주 선사를 찾아왔습니다. 당시 조주 선사는 주장자를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한눈에 봐도 멋있게 생긴 주장자였습니다. 선비는 욕심이 났습니다. 그걸 갖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다들 우러러보는 조주 선사의 주장자입니다. 더구나 주장자는 선사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그냥 달라고 하면 아주 무례한 일입니다. ‘어떡하면 저 주장자를 손에 쥘 수 있을까?’ 선비는 짧은 순간에 머리를 굴렸습니다.
사실 불가(佛家)에서는 ‘무소유(無所有)’를 강조합니다. 더구나 조주는 사람들이 존경하는 선사입니다. 그러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당연히 따르는 사람이겠지요. 선비는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불교는 무소유와 공(空)을 말하는 종교다. 모든 게 다 비어있다고 말한다. 조주 선사도 그런 생각을 바탕에 두겠지. 그럼 내가 주장자를 달라고 하면 내줘야 하지 않겠나. 불가의 선사가 그걸 갖겠다고 하면 욕심을 부리는 거니까. 무소유 정신과도 안 맞잖아. 그럼 앞뒤가 안 맞잖아.”
마침내 선비는 입을 뗐습니다.
“스님, 부처님은 중생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그렇다.”
“그럼 스님께서 들고 계신 주장자를 저에게 주십시오.”
선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겁니다. 조주 선사를 진퇴양난의 낭떠러지로 밀었으니까요. 왜냐고요? 만약 조주 선사가 “그래, 주겠다”라고 하면 주장자를 얻으니 좋고, 또 “안 된다. 줄 수 없다”고 하면 조주는 ‘욕심 많은 선사’가 되고 맙니다. 주장자에 집착하는 선사, 물건에 욕심내는 선사, 중생의 요구를 외면하는 선사라고 몰아붙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달리 방도가 있을까요. 조주 선사가 체면과 명분을 모두 챙기려면 주장자를 내줄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그릇
만약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장자를 내주겠습니까, 아니면 “안 된다”고 소리를 치겠습니까. 만약 ”안 된다!”고 소리를 친다면, 뒤이어 날아올 선비의 반박에 뭐라고 답을 하시겠습니까. 조주 선사는 정색을 하고서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자고로 군자(君子)는 남의 물건을 탐하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선비가 반박을 했습니다.
“저는 군자가 아닙니다.”
참, 당돌하지 않습니까. 조주 선사는 ‘군자’를 거론하며 점잖게 타일렀습니다. 그런데 무례한 선비는 조주의 타이름을 무시해버렸습니다. 자신은 군자가 아니라면서 말입니다. 그러자 조주 선사가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나도 부처가 아니다.”
세 그릇
이 일화를 읽다 보면 눈앞에 선합니다. 조주 선사의 대답을 듣고서 할말을 잃어버린 선비의 망연자실한 표정 말입니다. “나는 부처가 아니다”라고 하는데, 달리 무엇이라 반박할 수 있을까요. 저는 여기서 조주 선사의 명쾌한 안목을 읽습니다. 겉만 보면 조주 선사와 욕심 많은 선비가 주고 받는 재치있는 문답으로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순발력 넘치는 대화 말입니다.
그런데 한 꺼풀 벗기고 들어가면 달라집니다. 이 일화에는 생각의 패러다임을 부수는 조주의 안목이 숨어 있습니다. 차근차근, 하나씩 짚어볼까요.
먼저 선비가 올가미를 던집니다. “부처는 중생의 요구를 다 들어준다”는 생각의 틀입니다. 선비는 조주 선사가 이 올가미에 걸려들 거라 기대합니다. 조주가 부처라면 중생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니까요. 만약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조주 선사는 스스로 “나는 부처님만큼 수행이 안 됐다”라고 자인하는 셈이 되고 맙니다.
조주 선사는 이걸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선비가 내민 공식의 틀을 아예 부수어 버렸습니다. “나도 부처가 아니다”라는 한마디로 말입니다. 선비가 구축해 놓은 “부처는 중생이 원하는 건 다 들어준다”는 패러다임을 한 방에 무너뜨려 버린 겁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안목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네 그릇
사람들은 말합니다. “조주 스님은 순발력이 정말 뛰어나시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나는 부처가 아니다”라는 대답은 순간적인 재치나 순발력으로 꺼낼 수 있는 대답이 아닙니다. 이건 스스로 ‘생각의 틀’을 부수어 본 사람이, 틀이 부서진 후의 ‘틀 없는 바탕’에서 던질 수 있는 대답입니다.
살다 보면 우리도 이런 올가미에 수시로 걸려듭니다. 내가 던진 올가미에 내가 걸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스스로 정해 놓은 “나는 한 사람이야. 절대 바꿀 수 없어!” “나는 이렇게 생각해. 이것은 반드시 이래야만 해!”라는 고집의 틀, 생각의 틀이 올가미입니다.
그런 틀을 깨라고 하면 다들 두려워합니다. “그걸 깨트리면 아무 것도 남지 않잖아. 그럼 무얼 무엇을 가지고 이 세상을 헤쳐갈 수 있겠어? 그건 절대 놓을 수가 없어. 양보할 수가 없어.” 그렇게 고집을 부립니다. 설령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한 번 양보를 해보세요. 그리고 차분히 살펴보세요.
생각의 틀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닙니다. 그 자리에는 미리 그어놓은 선이 없어졌기 때문에, 어떠한 선이라도 그을 수 있는 여백이 생겨납니다. 그 여백에다 지금 이 순간 내게 필요한 선을 새로 그으면 됩니다. 조주 선사가 그랬습니다. “나는 선사다” “나는 부처다”라는 생각의 틀을 먼저 부수었습니다. 그리고 생겨난 여백에다 내게 필요한 선을 그었습니다. 그게 뭐냐고요? “나도 부처가 아니다”라는 새로운 선입니다.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저작권자 © 미디어조계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