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전남 장흥에 계시는 한승원 선생님으로부터 한 권의 책이 우편으로 왔다. 선생님의 자서전 『산돌 키우기』였다. 한승원 선생님은 불교계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고향인 전남 장흥의 율산마을에서 바다를 시원(始原)으로 한 작품들을 써오고 계신다. 책 속에 이런 문장이 있다.
“나에게는 시간이 있다는 말을 사랑한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은 ‘미래가 없는 것을 소멸시키는 신’이다. 그 시간 앞에서 소멸되지 않고 영원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바다나 산이나 하늘이나 해나 달이나 별이다. 영원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들은 자연 친화적인 것들인데 모두 신성을 갖고 있다.”
선생님은 “시간은 미래를 창조하지 못하는 존재들을 파괴하는 신이다. 시간은 자신을 완성시키려 하는 자, 자기의 영원한 미래를 창조하려 하는 자의 것이다.”라고도 쓰셨다. 즉 수행을 통해 자아를 완성하려는 사람만은 시간이 파괴하지 못한다는 말씀이었고, 그런 사람은 영원한 미래를 창조한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특히 이 ‘신성’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이 신성은 우주적인 율동을 뜻하는 것으로도 이해되었다. 한승원 선생님은 우주적 율동을 자비, 사랑, 어짊, 도(道) 혹은 그윽함[玄]이라고 이르기도 하셨다.
지난 주 일요일에는 작은 절의 일요법회에 참석을 했다. 코로나 19로 인해 많은 분들이 법당에 들어설 수는 없었지만, 함께 절을 하고, 기도를 하고, 스님의 법문을 듣고, 경전을 읽었다. 갈등과 근심이 없는 평온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봉축 발원문도 독송을 했는데,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도 이 ‘신성’이라는 말의 귀한 뜻을 이미 한 차례 새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이 함께 하는 모든 생명들의 청정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모든 소중한 인연들에 감사하며 온 생명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간절히 기도 올립니다. 오늘 지구촌 생명들을 위협하는 병마는 오직 인간만의 이익을 위하여 뭇 생명의 생존을 위협하고 개인의 탐욕에 물들어 이웃을 멀리하고 공동체의 청정함을 훼손하여 비롯된 것임을 깊이 성찰하며 참회합니다. 우리 모두는 고귀하고 거룩한 생명입니다. 청정한 마음과 몸으로 병마를 이기는 힘을 길러 함께 일어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이 봉축 발원문에서의 청정함이 곧 신성의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모든 생명들이 본래부터 갖고 있는 청정함과 신성이라는 이 자성을 잘 존중하고 보호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병마가 사라지고 갈등과 폭력이 사라질 것이다. 다른 존재가 신성한 존재라고 생각하면 함부로 하지 못하고, 그 존재를 나처럼 모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오해와 그릇된 행위는 나의 독선과 오만으로 비롯되며, 독선과 오만은 구분과 차별로부터 생겨날 것이니 다른 존재가 나처럼 신성하다고 여기면 구분과 차별도 한순간에 끊어질 것이다.
가령 불교와 인연이 깊은 이상국 시인이 최근에 펴낸 시집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에 실려 있는 시 ‘누군가 있는 것 같다’를 읽으면서도 ‘신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좀 길지만 전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산에 가 돌을 모아 탑을 쌓고 서원(誓願)을 했다
돌도 나를 모르고 나도
돌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게 돌에다 한 것인지
내가 나에게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탑을 쌓은 나와
탑을 쌓기 전의 내가 다르듯
탑이 된 돌들도 이미
그전의 돌은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서로 남은 아니었다.
그곳이 산천이거나 떠도는 허공이거나
우리가 무엇으로든
치성을 드리고 적공을 하면
짐승들도 함부로 하지 않고
비바람도 어려워하는 것 같았는데
산에 가 돌로 탑을 쌓고 서원을 했다.
돌도 돌만은 아니었고
나도 나만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와 나 사이에 누군가 있는 것 같다.”
한 평론가는 이상국 시인의 시에 대해 “이상국은 길에서 만난 모든 개물(個物)을 의도치 않게 이끌고 부처의 공능이 발현된 불국토의 세계에 들어가 있다”라고 평가했는데, 이 시에서도 이런 점을 잘 알 수 있다. 무심해 보이는 돌도 하나하나 쌓아 탑을 이루고, 또 그렇게 탑을 이루는 동안 돌 쌓는 이가 정성껏 기도를 하면 그 돌은 예전의 돌이 이미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입었기 때문이다. 돌은 신성한 돌이 된다. 또한 서원을 세워서 기도하고 치성을 드리면 ‘나’의 마음도 예전의 ‘나’가 아니다. 곧 신성한 자아로 거듭난다.
요즘처럼 푸른빛이 점점 짙어지는 한 그루 나무의 성장을 보면서, 혹은 울울창창해지는 숲을 보면서도 우리는 어떤 신성 같은 것을 느낀다. 깨끗한 잎을 펼치고 그늘을 넓혀가는 생명운동을 바라보면서 수목(樹木)이 지닌 청정함 같은 것을 느낀다. 우리의 수행도 마음을 가꾸는 일이요, 정신의 맑음과 신성을 가꾸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