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輪廻)는 산스크리트어 삼사라(Samsara: 계속된 흐름, Continuous flow)를 뜻에 따라 번역한 것으로 윤회전생(輪廻轉生) 또는 생사유전(生死流轉)이라고도 합니다. 마치 수레바퀴가 회전하여 멎지 않는 것처럼 중생이 번뇌와 업(業)으로 인하여 ‘길 잃은 세계(미계, 迷界)’, 즉 3계(三界: 욕·색·무색계) 6도(六道: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신)에 다시 태어나고 죽는 것이 끝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 괴로운 존재에서 벗어나는 경지가 열반(涅槃)입니다. 윤회 사상은 인도 사상의 현저한 특색이었으며, 불교 역시 이 사상을 기본적인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윤회를 반복하는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있는 모습(有, Bhava)’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불교의 교의에 따르면, 삼계 중 이 세상인 욕계에 태어난 중생(衆生, Sattva)은 여기에서 한 일(業)에 따라서 지옥·아귀·축생·아수·인간·천신의 여섯 가지 삶의 모습 가운데 하나를 취하여 저곳에서 돌아 넘어가게 됩니다. 이들 중 뒤의 세 가지(아수·인간·천신) 삶은 좋은 업을 이룬 이들이 돌아가는 길(삼선도 : 三善道)이라 부르며, 앞의 세 가지(지옥·아귀·축생) 삶은 나쁜 업을 이룬 이들이 지나가야 할 길(삼악도 : 三惡道)이라 부릅니다. 또한 깨달음을 성취해 감에 따라, 욕계를 벗어나 삼계(三界)의 다른 두 계인 색계 또는 무색계에 이르게 되며, 부처의 지위(열반)에 도달하면 삼계 속에 윤회하는 일이 그치게 됩니다. 불교의 교의에 따르면, 삼계육도(三界六道)는 우주가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三界)로 이루어져 있고, 이 중에서 욕계는 다시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신의 육도(六道)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직 부처님의 지위에 도달하지 못한 중생들이 끊임없이 벗어나지 못하고 죽고 태어나고를 무한히 반복하는 곳입니다.
지난번에 이어서 윤회와 인과에 관한 밀린다왕문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어떤 사람이 남의 쌀이나 고구마를 훔쳤다고 하는 경우도 망고 과일의 경우와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추울 때 불을 피워 몸을 녹이고 나서 불을 끄지 않고 가버렸는데, 불이 번져서 남의 밭을 태웠다고 합시다. 밭 주인이 그 사람을 왕 앞에 데리고 와 처벌을 내려 달라고 했을 때, 밭을 태운 사람이 말하기를, ‘대왕이여, 저는 이 사람의 밭을 태우지 않았습니다. 제가 끄지 않은 불과 이 사람의 밭을 태운 불은 다른 불입니다. 저는 죄가 없습니다.’고 한다면 왕은 그 사나이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존자여, 그러할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처음의 불을 원인으로 해서 일어난 다음의 불에 대하여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인간은 현재의 명칭과 형태로 인하여 선행 악행을 하게 되고, 그 행위로 인하여 또 하나의 새로운 명칭과 형태로 저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 태어난 인간은 그의 업(業)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어떤 사람이 등불을 가지고 자기 집 꼭대기 방으로 들어가 식사를 했는데, 등불이 지붕을 태우고 이어서 마을을 태웠다고 합시다. 마을 사람들이 그 사나이를 붙잡아 ‘당신은 어찌하여 마을을 태웠소’하고 물었습니다. 사나이는 ‘왜요, 나는 마을을 불태우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식사를 하기 위하여 밝힌 불과 마을을 태운 불은 다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입씨름을 하다가 왕에게 가서 그렇게 말한다면 왕은 어느 쪽 말이 옳다고 하겠습니까.
마을 사람들의 말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마을을 태운 불은 그 사람이 식사하기 위하여 사용한 불로부터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사람은 죽음과 함께 끝나는 현재의 명칭 형태와 저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명칭 형태가 다르기는 하지만, 두 번째 것은 첫 번째로부터 나온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악업(惡業)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또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어떤 사나이가 한 소녀에게 구혼하여 값을 치르고 갔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소녀가 장성하여 묘령의 처녀가 되었을 때, 딴 사나이가 값을 치르고 결혼했다고 합시다. 먼저 사나이가 와서 ‘당신은 왜 나의 아내를 데리고 갔소’라고 따졌습니다. 나중 사나이가 ‘나는 당신의 아내감을 데려간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구혼하여 값을 치른 어린 소녀와 내가 구혼하여 값을 치른 신부는 딴 여성입니다.’고 대답했다고 합시다. 그들이 입씨름을 하다가 왕 앞에서 재판을 요구한다면 왕은 어느 쪽을 옳다고 하겠습니까.
먼저 사나이가 옳다고 할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나중 사나이가 무슨 말을 하든 장성한 그 아가씨는 어린 소녀로부터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대왕이여, 그와 같습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현재의 명칭 형태와 저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명칭 형태는 딴 것이긴 하지만, 저 세상 것은 이 세상 것에서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악업(惡業)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어떤 사람이 소치는 사람으로부터 우유 한병을 사서 그에게 맡기고 가면서, ‘내일 가지러 오겠소’라고 했다고 합시다. 다음 날이면 그 우유는 응유(凝乳)로 변할 것입니다. 그 사나이가 와서 우유를 달라고 하므로 소치는 사람은 응유로 변한 그대로 내주었습니다. 사나이는 ‘내가 산 것은 응유가 아닙니다. 내 우유병을 내 주시오’라고 했습니다. 소치는 사람은 ‘나에겐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당신의 우유가 응유로 변했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입씨름을 하다가 왕 앞에서 재판을 바란다면, 왕은 어느 편이 옳다고 하겠습니까.
소치는 사람이 옳다고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유를 산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응유는 그가 산 우유가 변해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왕이여, 그와 같습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현재의 명칭 형태는 저 세상에 태어나는 명칭 형태와 다르지만, 응유가 우유로부터 나온 결과이듯이 사람은 악업(惡業)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