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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의 세상사는 이야기
새로운 시집이 출간되면 멀리서 제주에 살고 있는 내게 신작 시집을 보내오는 지인들이 많다. 지인들이 보내온 신작 시집을 읽는 일은 과일나무로부터 햇과일을 따서 먹는 일과 같은 희열이 있다. 한 편 한 편의 시에 실린 그이의 고유하고 특별한 마음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감각과 산뜻한 생각을 읽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우편으로 온 시집을 펼쳐놓고 마치 초여름의 신록을 보듯이 틈틈이 시편들을 읽는다.
얼마 전에는 신미나 시인이 시집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를 보내왔다. 덕택에 이 시집을 여러 날에 걸쳐서 읽었다. 시집에 실린 시 ‘지켜보는 사람’은 이렇게 멋지게 표현되어 있다.
“한알의 레몬이/ 테이블 위에/ 있다/ 오래전에 있었던 것처럼/ 금방/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눈을 감아도 레몬은/ 레몬으로서 있다/ 깨끗한 진심처럼/ 조용하고/ 단순한 그림자를 만든다// 한알의 레몬이/ 눈앞에/ 있다/ 그것을 치우면/ 레몬은/ 과거형으로 존재한다// 흰 테이블보 위에/ 레몬이 있다// 눈을 감아도/ 레몬은/ 레몬빛으로 남고//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진심으로 보인다”
시 ‘지켜보는 사람’은 제목 그대로 대상을 바라보면서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쓴 시이다. 여기에 한알의 레몬이 있다. 그 레몬은 테이블 위에 있고, 흰 테이블보 위에 놓여 있다. 동시에 그 레몬은 시간의 흐름 위에 가만히 놓여 있다. 바라보는 사람이 치우면, 즉 레몬이 놓여있는 풍경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 한알의 레몬은 사라지면서 과거형의 레몬이 된다. 그러나 치우지 않고 레몬은 지금, 여기에 있다. “깨끗한 진심”을 유지한 채, “조용하고/ 단순한” 모양과 상태로 있다. 바라보는 사람이 눈을 감아도 레몬은 레몬의 빛깔 그대로 존재한다.
이 시는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해 우리의 주관으로 분류하고, 좋고 나쁨을 가린다. 구별하고 차별하는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대상이 고유하게 갖고 있는 “깨끗한 진심”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부드럽고 신중하게 어떤 대상을, 어떤 존재를 바라보고 대해야 할 일이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사안 가운데에는 미얀마 사태가 있다. 종단에서는 미얀마에 자비와 평화가 오기를 촉구하면서 미얀마 시민들을 위한 모금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곳 제주에서도 많은 불자들이 미얀마 사태를 가슴 아프게 바라보고 있다. 특히 제주 불자와 제주 도민들은 끔찍한 4.3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지금 미얀마의 상황이 남의 일이 아닌, 바로 우리의 일로 여겨지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 제주 관음사에서는 ‘미얀마 평화기원법회’가 열리기도 했다. 현재 제주에 거주하고 있는, 많은 미얀마 이주민들이 법회에 참석을 했다. 이 자리에서 관음사 주지 허운 스님은 “총알과 수류탄에 맞서 목숨을 내놓고 항거하는 시민들의 숭고한 뜻은 국경을 넘어 양심 있는 세계 시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면서 “미얀마 시민들의 항거는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숭고한 행동”이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나는 이 법회에 참석해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정현종 시인이 쓴 시 ‘간단한 부탁’이 생각났다.
“저녁 먹고/ 빈들빈들/ 남녀 두 사람이/ 동네 상가 꽃집 진열장을/ 들여다보고 있는/ 풍경의 감동이여!// 전쟁을 계획하고/ 비극을 연출하는 사람들이여/ 저 사람들의 빈들거리는 산보를/ 방해하지 말아다오.// 저 저녁 산보가/ 내일도 모레도 계속되도록/ 내버려둬다오/ 꽃집의 유리창을 깨지 말아다오”라는 시였다.
이 시에서처럼 보통의, 평범한, 소박한 사람들은 평화를 갈구하고 폭력을 싫어하며, 안락에 머물기를 희망한다. 동네의 작은 꽃집 진열장을 바라보는 동안에 맞이하게 되는 화평하고 고요한 시간이 오래오래 지속되길 희망한다. 그 시간은 깨끗하고, 조용하고, 단순한 시간일 테다. 그 시간은 “빈들거리는 산보를/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며, “꽃집의 유리창을 깨지” 않는 시간일 테다. 이 시간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미얀마 모든 시민들의 바람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마당 한 귀퉁이에 작약이 꽃을 피웠다. 귤꽃도 꽃을 피웠다.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있으면 꽃은 어떻게 저 고운 빛깔과 향기를 제 몸속에 갖추고 있었을까를 생각하게 되고, 이내 감탄하게 된다. 캄캄한 밤에 귤꽃의 하얀 향기가 밀려오는 것을 느끼는 일은 참으로 귀한 기쁨의 경험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다보면 우리도 하나의 꽃나무요,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도 각양각색의 꽃과 향기가 들어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이처럼 깨끗한 진심이 조용하고도 단순한 상태로 들어있는 것이다.
문태준(文泰俊)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처서(處暑)」 외 9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애지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BBS 제주불교방송 총괄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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