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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성재헌의 경적독후

본래 깨끗한 마음

  • 입력 2021.07.01

원각경 위덕자재보살장 말씀에서


아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여쭈었다. 
“필요치 않은 생각, 삶을 불편하게 하는 감정들을 과감하게 버려야한다는 말씀에는 충분히 공감하고 또 동의합니다. 하지만 부처님, 과거에 대한 온갖 생각과 감정, 미래와 현재에 대한 온갖 생각과 감정마저 몽땅 버린다면 그건 곧 생각과 감정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닌가요? 생각과 감정이 있기 때문에 생물이고 사람이지, 생각과 감정이 없다면 저 나무토막이나 돌멩이랑 뭐가 다르답니까?”
부처님이 장난스럽게 입 꼬리를 삐죽거리셨다. 
“보살님, 제가 썩은 나무토막이나 돌멩이처럼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보이나요?”
아내가 멋쩍은지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모든 생각과 감정을 다 비우라는 말씀 아닌가요?”
“생각과 감정을 다 비우면 바보가 될까 두려우십니까?”
“두려움까지는 아니지만… 그게.”
“보살님의 그런 반응은 현재 보살님에게 익숙한 생각과 감정을 놓아버리기 싫어서 핑계거리를 찾는 것입니다. 처녀시절에 산 비싼 드레스를 차마 버리지 못해 만지작거리는 거랑 비슷하죠. 보살님, 그럼 제가 묻겠습니다. 보살님 옷장에 가득한 옷들을 몽땅 꺼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옷을 몽땅 버린다고요? 그럼 아무 것도 없게 되겠죠.” 
부처님께서 싱긋이 웃으셨다. 
“아닙니다. 아무리 꺼내려 해도 꺼내지지 않는 것이 있고, 아무리 버리려 해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아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수수께끼인가요?”
부처님께서 깔깔거리며 웃으셨다. 
“요리조리 비틀어서 이야기를 난해하게 만들어내자는 게 아닙니다. 누구나 당장 알아볼 수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길도 주지 않는 곳으로 시선을 유도하는 것뿐입니다. 자, 그게 뭘까요?”
아내가 짓궂게 눈살을 찌푸렸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게 뭔가요?” 
“옷장이지요. 텅 빈 옷장.”
아내가 손뼉을 쳤다. 
“맞아요. 옷장은 그대로 있네요?”
“텅 빈 옷장, 그것을 저는 ‘깨끗한 옷장’이라 부릅니다. 자, 그럼 또 묻겠습니다. 보살님 방에 가득한 살림살이들을 몽땅 꺼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 것도 없게 될까요?”
부처님 속내를 알겠다는 듯 아내가 빙그레 웃었다. 
“아니지요. 텅 빈 방, 즉 깨끗한 방이 남지요.”
“그럼, 또 묻겠습니다. 하늘에 온갖 모양의 구름이 가득합니다. 그 구름들이 몽땅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 것도 없게 될까요?”
“아니지요. 텅 빈 하늘, 즉 깨끗한 하늘이 나타나지요.”
“그럼, 또 묻겠습니다. 보살님 마음에 온갖 생각과 감정들이 가득합니다. 그 생각과 감정들을 몽땅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 것도 없게 될까요?”
아내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네요, 부처님. 생각과 감정들을 몽땅 버리면 나무토막이나 돌멩이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텅 빈 마음, 즉 깨끗한 마음이 나타는 것이네요.”
부처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으셨다. 
“바로 그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형무형의 소유물들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습니다. 즉 자신을 ‘그것을 가진 나’ 또는 ‘그것을 가졌던 나’ 또는 ‘그것을 가지려는 나’로 규정하지요. 그래서 그 소유물을 더 이상 소유할 수 없게 되면 자신의 정체성이 무너진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삶이 파괴된 것으로 여기지요. 즉 ‘그것’을 잃어버리면 곧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럴 때 많은 이들이 ‘허무(虛無)하다’는 표현을 씁니다. 자, 그럼 또 보살님께 묻겠습니다. 불쾌한 손님처럼 불쑥 찾아드는 그 허무함은 과연 어디서 왔을까요?”
아내가 정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처님, 그 손님은 밖에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디에서 왔지요?”
아내가 자세를 가다듬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허무함은 소유물에 사로잡힌 눈길 때문에 생긴 것이고, 소유물에서 눈길을 돌리지 못하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옷장 속에 차곡차곡 쌓아둔 옷을 ‘나’로 삼고, 들고 나는 살림살이를 ‘나’로 삼고, 뭉게뭉게 피어올라 각양각색으로 변화하는 구름을 ‘나’로 삼아 그것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 소유물들은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기에 언제 사라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들입니다.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니기에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지요. 허무함이란 그 불쾌한 손님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부처님 눈빛이 반짝였다. 
“그 표현이 매우 마음에 듭니다.”
아내가 고개를 들었다. 
“어떤 표현이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고집스러움, 저는 그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표현합니다. 허무함과 상실의 아픔은 밖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리석음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하지요.”
아내가 환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부처님, 본래 텅 빈 옷장이었고, 본래 텅 빈 방이었고, 본래 텅 빈 하늘이었는데…. 조금만 눈길을 돌려도 당장 버릴 수 있는데, 그걸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범부라 하고, 중생이라 하나 봅니다.”
부처님께서 허리를 숙이며 손가락을 하나 세우셨다. 
“보살님, 방금 하신 말씀에서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아내가 쫑긋했다. 
“제가 또 뭘 잘못 말씀드렸나요?”
“아닙니다. 보살님의 견해는 저의 견해와 일치합니다. 다만 보살님의 안목을 조금 더 넓히고 조금 더 정밀하게 다듬어드리려는 겁니다. 조금 전에 ‘본래’라는 단어를 쓰셨는데, 제가 듣기에는 그 단어를 ‘옛날에는’ ‘처음에는’처럼 과거형으로 사용하신 것 같아요. 물론 그렇게 이해하셔도 괜찮습니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옛날부터’ ‘처음부터’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렇게 되면 ‘본래’가 과거에 국한되지 않고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까지도 적용되지요. 옷이 꽉 찬 상태에서도 텅 빈 옷장은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그대로이고, 살림살이가 가득한 상태에서도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텅 빈 방은 그대로이고, 구름이 그득한 상태에서도 텅 빈 하늘은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그대로라는 의미가 되지요.”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다 되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는지 그 의도는 충분히 알겠습니다. 하지만 부처님, ‘텅 비었다’는 술어는 필연적으로 ‘무엇이’라는 주어를 필요로 합니다. 즉 옷이 없는 상태, 살림살이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요. 그러자면 과거건 현재건 미래건 구체적인 어느 한 시점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부처님께서 손뼉을 치셨다. 
“맞습니다. 옷장이나 방 하늘에 비유한 설명에는 그런 한계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 다른 것에 비유하여 그 ‘본래 텅 빔’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보살님 아침마다 거울을 보시죠?”
“네.”
“그럴 때 거울 속에 뭐가 있습니까?”
“제 얼굴이 비치지요.”
“그럼, 또 하나의 ‘나’가 거울 속에 있는 건가요?”
“그건 거울에 비친 영상이지요.”
“그럼, 거울 속에 있는 ‘나’는 진짜인가요, 가짜인가요?”
“그건 그림자, 가짜지요.”
“그럼 거울 속에 진짜로 있는 것은 뭔가요?” 
“아무 것도 없지요, 몽땅 가짜지요.”
“바로 그겁니다. ‘거울은 본래 텅 비어 깨끗하다’고 표현할 때, 아무 것도 비치지 않은 상태만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갖 삼라만상이 비치는 상태 그대로 거울은 본래 텅 빈 것입니다. 온갖 생각과 감정이 알록달록 문양을 이루는 우리의 마음도 그 거울에 비친 영상, 그림자와 같습니다.”
아내가 눈을 똥그랗게 뜨며 손뼉을 쳤다. 
“그렇다면 지금 이대로 제 마음이 본래 텅 빈 것이네요.”
부처님도 따라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으셨다.
“그렇지요.”



성재헌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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