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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는 다만 길을 안내할 뿐이다
인도의 엘로라 석굴에 있는 불상
인도 엘로라 석굴의 불상에 햇빛이 비치고 있다.
■세 그릇
“브라흐민이여, 그대는 라즈가하로 가는 길을 아는가?” 라즈가하는 라즈기르의 옛지명입니다. 라즈기르는 부처님이 세운 첫 사원인 죽림정사가 있는 곳입니다. 한자로는 왕사성(王舍城)이라고 부릅니다.
“네에,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와서 라즈가하로 가는 길을 물었다고 하자. 그대는 이렇게 설명할 것이다. ‘이 길은 라즈가하로 갑니다. 좀 더 따라가면 어떤 마을이 보이고, 조금 더 가면 도시가 보입니다.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아름다운 공원과 숲과 들판과 연못이 있는 라즈가하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대의 이런 충고와 안내를 듣고서도 그 사람은 잘못된 길을 골라 서쪽으로 갈지도 모른다.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묻는다고 치자. 그대는 조금 전과 똑같이 설명을 한다. 그 사람은 그대의 충고와 안내를 듣고 안전하게 라즈가하에 도착한다.”
부처님은 브라흐민의 물음을 고스란히 되돌려주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보라. 목적지인 라즈가하가 있고, 라즈가하로 가는 길이 있고, 그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 있다. 길을 묻는 사람은 똑같은 안내와 충고를 듣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잘못된 길을 택해 서쪽으로 가고, 또 어떤 사람은 안전하게 라즈가하에 도착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자 브라흐민은 당황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건 제가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부처님, 저는 다만 길을 안내하였을 뿐입니다.”
이 말을 듣고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래는 다만 길을 안내할 뿐이다.”
■네 그릇
초기 불교의 생동감을 보여주는 팔리어 경전에 수록된 장면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처님은 참 과학적인 분입니다. 이치를 관통한 사람이니 과학적일 수밖에 없겠지요. 부처님은 “나를 믿어라. 그럼 내가 모든 걸 해결해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나는 길을 안내할 테니, 너희는 그 길을 잘 따라가라”고 말했습니다.
가령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기를 원합니다. 그럼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경부 고속도로 위에 나의 바퀴를 올려놓는 일입니다. 이게 첫 단추입니다.
그럼 그 다음은 뭘까요? 맞습니다. 바퀴를 굴리는 일입니다. 나의 바퀴를 한 바퀴, 두 바퀴 굴려야만 서울을 떠나서 부산에 가닿게 됩니다. 그런데 종교를 가진 많은 사람이 착각합니다. 경부 고속도로 위에 바퀴만 올려놓으면 저절로 부산에 가는 줄 압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바퀴만 올려놓고서 이미 부산에 도착한 걸로 착각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부처님은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여래는 다만 길을 안내할 뿐이다.” 그러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지도이자 네비게이션입니다. 네비게이션을 제아무리 ‘부산 해운대’로 정확하게 설정해 놓는다고 해도 바퀴를 굴리지 않으면 나는 여전히 서울에 있을 뿐입니다.
그럼 핸들을 잡고 바퀴를 굴리는 일은 누구의 몫일까요. 그렇습니다. 전적으로 나의 몫입니다. 왜냐고요? 여래는 다만 길을 안내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불교에서 핸들을 잡고 바퀴를 굴리는 구체적인 일이 뭘까요? 다름 아닌 마음공부입니다. 선방의 스님들이 여름 석 달 산문 출입을 금한 채하는 정진 수행도 실은 마음공부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따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건 선방의 수행자들이나 가능한 일이지. 우리처럼 세속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이 어떻게 수행을 할 수 있나? 불교의 역사를 돌아보라. 그렇게 수행을 하고도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몇이나 되나? 아라한의 경지에 든 사람이 몇이나 되나?”
맞는 말처럼 들립니다. 조목조목 따져보면 틀린 말입니다. 물론 부산에 도착하면 궁극의 자유를 얻습니다. 그렇지만 부산에 도착해야만 내가 자유로워지는 건 아닙니다. 서울에서 출발해 판교까지, 수원까지, 안산까지, 천안까지 가더라도 간만큼 자유로워집니다. 그게 마음공부입니다. 내가 서울에 있을 때랑 판교에 있을 때를 비교해도 아주 큰 차이가 납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마음공부를 통해 부산에 도착할 가능성은 몇몇 소수에게만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100%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본래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게 아니라, 부처가 중생이 아님을 깨닫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 어디에 숨어있을 지 모를 금덩어리를 찾아나서는 게 아니라, 내 주머니에 이미 있는 금덩어리를 찾는 일입니다.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저서 『생각의 씨앗을 심다』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만약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이제, 마음이 보이네』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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