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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성재헌의 경적독후

번뇌, 잠시 그냥 두셔도 괜찮습니다

  • 입력 2021.08.01

원각경 위덕자재보살장 말씀에서 

 

재빠른 아내의 반응이 꽤나 마음에 드셨는지 부처님께서 환한 미소를 보이셨다. 
“보살님이 거사님보다 훨씬 영민하시군요.” 
아내도 남편도 한바탕 크게 웃었다. 큰 웃음소리가 잦아들 무렵 부처님께서 다시 조용히 말씀을 이어가셨다. 
“그 거울과 같은 마음에 집중하는 것, 그것을 저는 사마타(samatha)라고 합니다. 즉 분분했던 생각과 감정들을 버리고 말끔히 청소하는 것이지요.”
아내가 갑자기 부처님의 말씀을 끊었다. 
“부처님!”
“예?”
“조금 전에 ‘번잡한 생각과 감정을 버리고 말끔히 청소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그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좀 전과 다르게 아내의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당당함이 묻어났다. 아내의 갑작스런 행동에 부처님이 심히 궁금하시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되물으셨다. 
“그럼 어떻게 표현해야 정확할까요?”
아내가 장난꾸러기처럼 입술을 삐죽거렸다. 
“거울은 본래 채워진 적이 없는데 무엇을 버리겠습니까? 거울은 본래 더럽혀진 적이 없는데 무슨 청소가 필요하겠습니까?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감정과 생각, 그것이 몽땅 거울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줄 알기만 하면 비울 것도 없고, 깨끗이 청소할 필요도 없지요.”
부처님께서 깜짝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셨다. 그렇게 한참을 말씀이 없다가 이내 조용히 입을 여셨다. 
“보살님은 ‘번뇌를 버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하셨습니다. 놀랍습니다. 제가 여러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보살님처럼 제 말뜻을 이렇게 빨리 이해하고 제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제 마음이 참 기쁩니다.”
아내가 조용히 일어나 무릎을 꿇더니 부처님을 향해 합장을 했다. 그 조심스러운 움직임과 손끝의 가지런함에서 부처님을 향한 더할 수 없는 존경심이 묻어났다. 
아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부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저의 경솔함을 탓하지 않고 이렇게 친절하게 맞아주지 않으셨다면, 저의 어리석음을 탓하지 않고 거듭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고뇌에 시달리는 삶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핍과 권태를 반복하며 행복의 무지개를 쫒아 내달리는 무모한 삶, 가야할 길은 먼데 서산에 해는 지고 쉬어갈 주막 하나 없어 어두운 밤길마저 내쳐 재촉해야 하는 고단한 나그네의 삶, 상처를 긁고 또 긁어 덧난 그 상처에서 증오와 원망의 고름이 줄줄 흐르게 하는 바보 같은 환자의 삶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부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저는 두 눈을 멀쩡히 가지고도 맹인처럼 살고, 두 귀를 멀쩡히 가지고도 귀머거리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 줄도 몰라 좌충우돌하고 갈피를 잡지 못해 허둥지둥하다가 회한의 눈물만 남긴 채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부처님께서 진실을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평생 거짓을 진실로 여기며 제고집만 부리다가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실로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분이시고, 어두운 밤길에 등불을 밝혀 길을 비추는 분이시고, 두 손을 활짝 펼치고 눈 있는 자는 보라며 당당히 외치는 분이십니다. 
부처님, 저는 오늘부터 당신을 공경하고, 당신께 귀의하고, 당신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당신을 닮아가겠습니다.”
곁에 있던 남편이 안절부절 하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내의 진중한 말과 행동이 평소 아내가 보이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 아내가 남편의 눈에는 꼭 연극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편이 어색함을 풀어볼 요량으로 멋쩍은 웃음에 농담이랍시고 한마디 던졌다. 
“당신, 오늘 좀 오버하는데.” 
아내의 반응은 의외였다. 아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남편의 손을 꼭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여보. 지금 저의 행동은 제 마음을 부처님께 그대로 표현한 거예요. 결코 과한 표현도 아니고, 예의랍시고 어디서 보고 들은 말과 행동을 흉내 낸 것도 아니에요. 당신이 곁에 있어 부끄러움에 참았지만, 당신이 이 자리에 없었더라면 아마 저는 하염없이 눈물이라도 흘렸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에게도 감사해요. 당신이 부처님을 뵈러 같이 가자고 권하지 않았다면, 저에게 오늘과 같은 날은 끝내 없었을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여보.”
그런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던 부처님께서 흐뭇한 웃음을 보이며 말씀하셨다. 
“참 보기가 좋군요. 지금까지는 보살님에게 열반이라는 새로운 길을 걷도록 권하는 말을 했지만 이제부터는 보살님을 같은 길을 가는 벗, 수행자로 맞이해야겠군요.”
“네, 부처님. 감사합니다.” 
아내가 부처님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부처님께서 말씀을 이어가셨다. 
“텅 빈 거울처럼 깨끗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 이 마음의 바탕이 본래 그런 줄 보고 알고 깨달아 거울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온갖 감정과 생각에 휘둘리지 않는 것을 사마타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보살님은 이런 사마타가 분잡한 일상생활에서도 끊어짐 없이 항상 유지될 수 있도록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을 사마디(samadhi) 즉 삼매(三昧)라 합니다. 
자, 그럼 한발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이 마음의 실상(實相)을 깨달았으면 이제부터는 이 마음의 올바른 사용법도 알아야 합니다. 즉 비유를 들자면 이 마음이 본래 텅 빈 거울과 같음을 깨달았으면 이 거울의 올바른 사용법도 알아야겠지요?”
“네, 부처님.”
아내가 꾀꼬리처럼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이 대견스러우신지, 부처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마음’이 본래 텅 빈 거울과 같고, ‘내 마음’이라 여겼던 온갖 감정과 생각들이 거울에 비친 그림자처럼 실체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다음에는 그 마음이 어떻게 될까요?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마음이 늘 지속될까요? 소위 번뇌 망상이라 불리는 반갑지 않은 감정과 생각들이 이제부터는 두 번 다시 생기지 않을까요?” 
아내가 싱긋이 웃었다. 
“부처님. 저를 염려해 주는 마음이 깊으셔서 또 점검해 보시는군요. 그럼, 부처님의 염려를 덜어드리기 위해 저의 소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한 바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는 ‘온갖 감정과 생각에 휘둘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지 ‘온갖 감정과 생각을 없애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감정과 생각을 억지로 바꾸거나 없애려 드는 것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를 지우겠다고 수세미로 문지르는 짓만큼이나 어리석습니다. 제가 부처님의 의도를 파안한 바에 따르면, ‘분잡한 일상생활에서도 고요한 사마타가 끊어짐 없이 항상 유지되도록 노력하라’는 말씀도 ‘모든 감정과 생각이 그림자처럼 실체가 없다는 것을 놓치지 말고 투철하게 깨달아라’는 것이지, 마음이라는 그 거울에 어떤 영상도 나타나지 않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마타를 통해 어떤 감정도 어떤 생각도 없는 상태를 터득하고 그런 상태가 유지되기를 바란다면 그건 거울에 두 번 다시 영상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헛된 기대입니다. 또한 만약 누군가 ‘나는 사마타를 터득하였다. 나에게는 어떤 감정도 어떤 생각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내 마음이 그 전과 달리 이렇게 고요해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 사람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마타를 제대로 이해한 것도 아니고, 제대로 실천한 것도 아니고, 제대로 터득한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내 거울에 이제는 두 번 다시 어떤 영상도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거울은 인연 따라 온갖 영상을 나타내기 마련입니다. 만약 무엇을 비추건 그 무엇도 나타나지 않는 거울이 있다면 그 거울은 제 기능을 못하는 고장 난 거울입니다. 그런 거울을 어디다 쓰겠습니까? 부처님의 간곡한 가르침을 제멋대로 해석해 사마타를 거울을 망가트리는 짓쯤으로 곡해한다면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내의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내에게 물으셨다. 
“그럼 반갑지 않은 손님처럼 불쑥 찾아드는 불쾌한 감정과 생각들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
아내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처리하긴요, 그냥 두지요.”
“괜찮을까요? 당장 내쫓아야 하지 않을까요?”
“손님이라면서요? 주인노릇을 하려 든다면 한바탕 난리법석을 떨겠지만, 잠시 머물다 스쳐갈 나그네인데 소란 떨 것 있나요? 번뇌 망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주인노릇을 하면 소란스럽겠지만, 그것이 손님이란 걸 안다면 특별히 어떻게 해야 할 것은 없지요.”
아내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혼자 싱긋이 웃었다. 
“어찌되었건 기왕에 찾아든 손님이니 잘 대접해서 보낸다면 더 좋겠군요.”
부처님께서 손뼉을 치며 크게 기뻐하셨다. 

 


 

성재헌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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