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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문태준의 세상사는 이야기

풀과 돌멩이

  • 입력 2021.08.01

 

단풍나무 밑에 어제 없던 풀 하나 솟았습니다

불두나무 밑에 어제 없던 풀 둘 솟았습니다

목련나무 밑에 어제 있던 풀 둘 뽑았습니다

배롱나무 밑에 어제 없던 풀 하나 솟았습니다

라일락나무 밑에 어제 없던 돌 하나 뽑았습니다

조팝나무 밑에 어제 없던 풀 하나 뽑았습니다 


날아가던 나비 한 마리는 허공이 뽑았습니다

 

 

 

이 시는 작고한 오규원 시인이 생전에 쓴 시 ‘풀과 돌멩이’이다. 이 시를 나는 요즘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반복해서 읽는다. 이 시를 읽는 이유는 내 여름날의 일상이 풀과 돌멩이와 다투고 어울리며 지내는 시간이기도 한 탓이다. 

제주시 애월읍의 한 시골 마을로 이사를 한 후 아침과 저녁에 풀을 뽑고 돌멩이를 캐는 일을 매일매일 하고 있는 까닭이다. 아내가 태어났던 집터에는 빈집만이 오랜 세월동안 남아 있었는데, 이 빈집을 허물고 새로운 집터를 닦고, 살아갈 집을 설계하고, 벽을 세우고, 지붕을 올렸다. 마당도 얻었고, 작은 텃밭도 얻었다. 

텃밭에 있던 죽은 나무의 거대한 뿌리들을 뽑는 일은 고된 일이었다. 경작을 하지 않았던 텃밭은 풀들과 돌들의 세상이었다. 그래서 텃밭에 채소와 화초를 심으려 비교적 시원한 때에 틈을 내서 돌을 캐내고 풀을 뽑았다. 돌은 캐내어 돌무더기를 쌓으면 끝이었지만, 풀은 뽑아도 금방 돋고 자라나고 번져갔다. 풀은 마치 불처럼 번져갔다. 풀은 맹렬해 무서웠다. 나는 풀보다 돌멩이를 귀하게 보게 되었다. 돌멩이로부터는 침묵을 들추어냈고, 풀로부터는 집착을 끄집어냈다. 돌멩이로부터는 부드러운 미소가 흘러나왔지만, 풀로부터는 억세고 고집스러운 악착이 흘러나왔다. 돌멩이와 풀은 내게 어떤 명상의 시간을 안겨주기도 했다. 

물론 돌에 대한 나의 명상은 예전부터 이어져 온 것이었다. 나는 나의 졸시 ‘입석(立石)’을 통해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었다. 

 

 

 

 

그이의 뜰에는 돌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 돌을 한참 마주하곤 했다

돌에는 아무 것도 새긴 게 없었다

돌은 투박하고 늙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나는 그 돌에 매번 설레었다

아침햇살이 새소리와 함께 들어설 때나

바람이 꽃가루와 함께 불어올 때에

돌 위에 표정이 가만하게 생겨나고

신비로운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그리하여 푸른 모과가 열린 오늘 저녁에는

그이의 뜰에 두고 가는 무슨 마음이라도 있는 듯이

돌 쪽으로 자꾸만 돌아보고 돌아보는 것이었다

 

 

 

내게 돌은 어떤 마음처럼 여겨졌다. 어떤 존재처럼 여겨졌다. 그동안 잠잠하게 덮여 있었던 내심(內心)과도 같이 여겨졌다. 게다가 하나하나의 돌은 보석을 숨긴 돌이었다. 돌탑이나 특별한 형상을 이룬 돌무더기를 볼 때에는 유연(有緣)에 대해 사유했다. 유연이란 무엇인가. 유연은 인연을 이르는 것 아니겠는가. 돌과 돌이 만나 아래위로 받치고 얹히면서 돌은 집적을 완성한다. 잔돌과 큰 돌이 어울리면서 하나의 쌓임을 완성한다. 각각의 몫을 다하면서 조화의 세계를 만든다. 그러므로 나는 돌과 돌들의 쌓임을 보면서 그 자체가 마음이요, 존재라는 생각을 해왔던 셈이다. 텃밭을 가꾸면서 비록 돌들을 캐냈지만 그것은 돌들을 버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 잔돌과 큰 돌로 돌담의 일부를 쌓거나 밭의 경계를 이루게 하였다. 심지어 돌에 푸른 이끼가 얹히는 시간을 기다리거나, 돌을 깨끗하게 씻어 서재 한쪽에 두곤 돌의 고요함과 돌의 신뢰와 돌의 안정을 배우기도 했다. 경전에서도 네모나고 단단하고 반듯한 돌처럼 마음을 단속하라고 이르지 않았던가.

 

반면에 풀로부터는 악착을 보았다. 끊어지지 않고 발생하는 것들을 보았다. 감각의 사용이 제어되지 않으면 풀처럼 되리라고 생각하며 경계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 도무지 풀은 솟지 않는 곳이 없었고,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방심하는 사이에 다시 돋았다. 

경전에서는 모든 감각기관의 문을 굳게 지키고 그 마음을 잘 붙잡아 매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눈의 빛깔과 귀의 소리와 코의 향기와 혀의 맛과 몸의 촉감과 생각의 분별을 잘 다뤄야 욕망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고, 들짐승 같은 마음이 사라져 얼굴이 편안해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 풀은 곧 들짐승 같은 마음이요, 존재처럼 여겨졌다.            

 

“탐욕이란 때맞추어 오는 비처럼 그 욕심이 자꾸자꾸 자라서 만족할 줄 모른다.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만 많으니,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관조(觀照)해 떨쳐 버리려고 한다.” 이 말씀은 ‘증일아함경’의 말씀이다. 나는 끝없이 자라는 풀을 뽑는 노동을 통해 자꾸자꾸 자라려는 탐욕을 관조한다. 많은 경전에서는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얻게 되는 이익을 구체적으로 말한다. 슬픔이나 두려움이 적고, 마음이 평온해지고, 여유가 있고, 항상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하소연을 하지 않고, 노심초사하지 않고, 다투지 않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풀과 돌멩이를 다루는 시간도 곧 우리에겐 수행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문태준(文泰俊)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처서(處暑)」 외 9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애지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BBS 제주불교방송 총괄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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