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조계사 뉴스

조계사보 칼럼

[연재완료] 성재헌의 경적독후

사마타와 삼마발제

  • 입력 2021.09.01

원각경 위덕자재보살장 말씀에서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깔깔거리며 대화를 이어가는 부처님과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며 남편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소란스럽게 맞장구를 쳤다가 덥석 반론까지 제기하는 둘의 모습이 마치 몇십 년은 족히 알고 지낸 허물없는 친구사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둘의 대화는 그렇게 지켜보는 사람을 샘나게 할 만큼 다정스러웠다.  
부처님께서 아내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습니다. 거울은 본래 텅 비어 그 속에는 그 무엇도 없지만 인연 따라 그 무엇이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 거울과 비슷합니다.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거울은 쓸모없는 거울입니다. 또한 거울은 황금과 똥을 가리지 않습니다. 황금이건 똥이건 인연 따라 거울에 그 모습이 비칠 수 있지요. 만약 황금만 비치고 똥은 비치지 않는 거울이 있다면, 그건 고장 난 거울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인연 따라 기쁨이 찾아들기도 하고, 슬픔이 찾아들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평온함이 찾아들기도 하고, 산란함이 찾아들기도 합니다. 혹자는 수행을 하면 기쁨과 평온함 등 바람직한 심리들만 항상 지속되고 슬픔이나 산란함 등 반갑지 않은 심리들은 영원히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내가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부처님, 제가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부처님이 눈을 찡긋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한술 더 떠 ‘슬픔이나 두려움 따위는 더 이상 나에게 없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겪건 나는 항상 기쁘고 평온하게 되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도 있지요?”
아내가 깔깔대며 웃었다.
“맞아요, 간혹 그런 사람도 있지요.”       
“보살님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평하겠습니까?” 
“그건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바람일 뿐이지, 본래 그럴 수가 없는 일입니다. 또한 정말로 슬픔과 두려움에 물들지 않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기쁨과 평온함에도 물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슬픔이나 두려움 따위는 더 이상 나에게 없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겪건 나는 항상 기쁘고 평온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다면, 실현되기를 바라지만 현재 실현되지 않은 일을 이미 실현된 것처럼 착각하고 주장하는 과대망상증 환자나 마찬가지입니다. 또 한걸음 양보해서 항상 기쁘고 평온한 마음만 있는 사람이 정말로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은 올바른 수행자나 현자나 성자라 할 수 없습니다. 늘 빨간색만 비치고 파란색은 끝내 비치지 않는 고장 난 거울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러니 도리어 보통사람만도 못하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훌륭한 수행자란 슬픔도 기쁨도 두려움도 평온함도 인연 따라 생겨나 머물다 사라지는 것임을 통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슬픔이 찾아와도 ‘나는 슬프다’고 소리치지 않습니다. 기쁨이 찾아와도 ‘나는 기쁘다고’고 소리치지 않고, 두려움이 찾아와도 ‘나는 두렵다’고 소리치지 않고, 평온함이 찾아와도 ‘나는 평온하다’고 소리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현자는 그 슬픔과 기쁨과 두려움과 평온함의 실상(實相)을 알기에 그 슬픔과 기쁨과 두려움과 평온함에 사로잡히지 않고, 상황에 따라 그 슬픔과 기쁨과 두려움과 평온함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성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 역시도 그 슬픔과 기쁨과 두려움과 평온함의 실상을 깨달아 그 슬픔과 기쁨과 두려움과 평온함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슬픔과 기쁨과 두려움과 평온함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도록 깨우쳐주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만약 ‘나는 항상 기쁘고 평온한데 너는 그렇지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부처님 가르침의 본뜻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또한 그런 사람은 올바른 수행자도 현자도 성자도 아닙니다.” 
아내의 긴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부처님께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보살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보살님은 이미 훌륭한 수행자의 문턱을 넘었습니다. 왜냐하면 온갖 감정과 생각들의 실상(實相)을 통찰할 줄 아는 안목이 활짝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마타(samatha)입니다. 그 안목이 어두워지지 않아 복잡다단한 일상생활에서 항상 열려있다면 온갖 감정과 생각들에 사로잡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사마타가 항상 그 힘을 발휘하게 된다면 그것이 삼매(三昧)입니다. 보살님은 이제 이 삼매를 바탕으로 삼마발제(samapatti)를 닦아 수행자의 길을 넘어 현자의 길을 걷고 성자의 길을 걸으셔야 합니다.”
아내가 부처님께 합장하고 낮은 목소리로 여쭈었다.
“부처님, 앞서 사마타와 삼매에 대한 설명은 들었지만 삼마발제는 처음 듣는 용어입니다. 삼마발제란 무슨 뜻입니까?”
“삼마발제란 삼매의 결과로 드러나는 지혜라는 뜻입니다.”
“삼매의 결과로 드러나는 지혜요?”
아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내 부처님께 여쭈었다.
“실상을 통찰하는 지혜 없이 어떻게 사마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다시 그 사마타를 바탕으로 한 삼매로 인해 지혜가 발생한다는 말씀인가요? 그럼 뒤에 발생하는 지혜는 앞에 발생한 지혜와 다릅니까?”
부처님께서 천천히 손을 펴 보이며 말씀하셨다.
“보살님은 이것을 뭐라 부르시겠습니까?”
“손바닥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제가 이것을 다섯 손가락이라고 부르면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보살님이 손바닥이라 부른 대상과 제가 다섯 손가락이라 부른 대상이 다른 것입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그와 유사합니다. 사실 사마타와 삼마발제는 같은 것에 붙여진 다른 이름입니다. 다만 무엇에 주목하는가가 다를 뿐이지요. 보살님, ‘온갖 생각과 감정은 실체가 아니다’는 명제에 동의하십니까?”
“예, 동의합니다.”
“이 하나의 명제에서 ‘실체가 아니다’에 방점을 찍고 주목해 설명하면 그것을 사마타라 하고, ‘온갖 생각과 감정’에 방점을 찍고 주목해 설명하면 그것을 삼마발제라고 합니다. 즉 ‘여태 생각과 감정이 실체라고 여겼는데 자세히 관찰해 보니 생각과 감정은 인연 따라 생겼다 머물다 사라지는 것이지 실체가 아니다’고 깨달으면 그것이 사마타이고, ‘실체가 아니라고 해서 영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은 인연 따라 얼마든지 생겼다 머물다 사라진다’고 깨달으면 그것이 삼마발제입니다.” 
아내가 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부처님, 그래도 저는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싱긋이 웃으셨다. 
“용어와 표현이 낯설어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지, 사실 보살님은 삼마발제가 뭔지 이미 알고 있고, 저에게 설명까지 했습니다.” 
아내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제가 언제요?”
“조금 전 거울 속에 나타나는 영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습니까? 특정한 영상만 나타나는 거울은 고장 난 거울이고, 무엇을 비추어도 영상이 나타나지 않는 거울은 쓸모없는 거울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예, 그렇게 말씀드렸지요.”
“그것이 삼마발제입니다. 거울 속에 토끼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리석은 사람은 거울을 가리키며 ‘저기에 토끼가 있다’고 합니다. 그때 현명한 사람이 그 어리석은 사람에게 ‘저기에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토끼는 없습니다’라고 깨우쳐 주면 그것이 사마타입니다. 또 그 현명한 사람이 그 어리석은 사람에게 ‘저기에 있는 것은 사실 거울에 비친 토끼 그림자일 뿐입니다’라고 깨우쳐 줄 수도 있겠지요?”
“예”
“그것이 삼마발제입니다.”
아내가 손뼉을 쳤다. 
“아! 그렇군요.” 



 

성재헌 (조계사)

저작권자 © 미디어조계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