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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문태준의 세상사는 이야기

남 한번 할퀴어본 적 없는

  • 입력 2021.09.01

“흰구름 무더기 속에 삼간 초막이 있어/ 앉고 눕고 거닐기에 저절로 한가롭다/ 차가운 시냇물은 반야(般若)를 노래하고/ 맑은 바람 달과 어울려 온몸에 차다.” 

 

이 시는 나옹선사의 시이다. 깊은 산속에 작은 살림을 차려놓고 은둔하는 사람이 있다. 그이는 단순하고 작은 것으로부터 행복을 얻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한 마음이니 생명 세계의 움직임이 아름다운 환희의 노래 아닌 것이 없다. 

제주도 애월읍의 한 시골 마을로 이사 온 이후로 늘 이 자연 속에 살고 있다. 한 시인은 “어떤 가구보다 영원불멸한 것은 자연./ 거기에 너를 새겨 넣어라./ 온화한 수염이 지켜보시는/ 대자연의 가구 속에,/ 천진스러운 경애심으로.”라고 썼다. 참 멋진 표현이다. 온화한 대자연이라는 가구에 나 스스로를 편입시켜 살게 하라는 뜻이다. “천진스러운 경애심”을 갖고 대자연을 대하면서 말이다. 

 

자연 속에서 일어나고, 자연 속에서 노동하고, 자연 속에서 잠들면서 소유에 대한 생각도 조금은 바뀌고 있는 듯하다. 꼭 필요한 것의 가짓수가 적어졌고, 그래서 새로 사들이는 것들의 목록이 줄었고, 되도록 있는 것을 활용하고, 그러다 보니 시장에 가서 뭘 더 사겠다는 생각을 눈에 띄게 덜 하게 되었다. 씨앗을 구해서 심고 길러 연한 싹으로 만든 나물을 얻어먹으니 부족함이 없이 충분히 좋다. 나무 그늘 아래에 의자를 놓고 복잡한 생각을 하나씩 밀쳐내 버리고 있으면 그것도 좋다. 그러면 새의 노랫소리가 더 영롱하고 선율이 더 곱다. 푸른 잎사귀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바람이 왔다 간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법정 스님께서 이르신 말씀들에 공감하게도 된다. 스님께서는 무소유 법문을 통해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라고 하셨다. 

마음의 사용도 조금은 달라지고 있다. 아무래도 이웃해 사는 분들의 삶을 돌담 너머로 지켜보게 되면서부터가 아닐까 한다. 이 이웃들은 매우 부지런하고, 말수가 적으며, 화를 내지 않는다. 얼굴은 햇살에 검게 그을렸으나 마음은 밝은 빛이어서 하루에도 같은 사람과 여러 번 인사를 나누고, 땅에서 얻은 것과 산 물건들의 일부를 이웃에게 준다. 그러면서 남의 말은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하지 않는다. 나는 이 이웃들의 인심을 겪으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평화로움을 느꼈다. 이렇게 사는 것 자체가 하나의 수행과도 같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일전에 어느 책을 보다 보니 대만의 자재공덕회주 증엄화상의 ‘보천삼무(普天三無)’를 소개한 내용이 있었다. “온 천하에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를 서원합니다. 온 천하에 내가 믿지 않는 사람이 없기를 서원합니다. 온 천하에 내가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를 서원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내 이웃들이야말로 이 보천삼무의 실천자라고 해도 될 듯했다. 아직 나는 이웃들의 넉넉하고 푸짐한 마음의 사용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조금씩 배워 베풀면서 살아가려고 하고 있다. 

어렸을 적에 내 사는 집 뜨락에는 해질녘이면 누군가 두고 간 것들이 거의 매일 있곤 했다. 누군가는 부추를 놓아두고 가고, 누군가는 갓 딴 복숭아를 몇 개 놓아두고 가고, 누군가는 밑동이 하얀 무를 놓아두고 갔다. 들에서 돌아오다 우리 집 앞을 지날 적에 베푸는 마음이 절로 일어 우리 집 뜨락에 왔다 가시는 것이었다. 어머니께서도 당신이 나눌 수 있는 것을 그 크기나 양과 관계없이 나누시려고 애쓰셨다. 그런 옛 풍경들이 지금 내가 사는 마을에 아직도 남아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시영 시인의 시 가운데 ‘장모님’이라는 시가 있다. “기차가 익산 부근을 지날 때였다. 일행 중 누군가 소리쳤다. “아, 저 집 장모님 인심 한번 좋겠다!” 얼핏 돌아보니 새로 인 노란 초가지붕에다 반지르르한 마루며 시원한 시누대 울타리, 조붓한 마당엔 남 한번 할퀴어본 적 없었을 듯한 순둥이 한 마리가 기차를 향해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뒤란 장독대에서 일 보던 넉넉한 체수의 장모님이 “뭔 일이다냐?”하며 치마 말미를 훔치며 금방 돌아 나올 것만 같은 집.”

 

이 시도 사람의 인심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그 사람은 시인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다. 기차 차창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 속에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새로 인 지붕과 매끄럽고 윤이 나는 마루와 가는 대나무의 울타리와 조금은 좁은 듯하지만 말끔한 마당과 마당에서 놀고 있는 강아지 한 마리를 보자마자 이 풍경 속에 사는 사람의 성품과 인심이 아마도 아주 좋을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몸의 크기가 조금은 크신 장모님이 살고 계실 것이라고 시인은 짐작한다.

내가 이 시에서 제일로 마음에 들어하는 시구는 “남 한번 할퀴어본 적 없었을 듯한 순둥이 한 마리”라는 대목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상처를 주는 경우가 더러 있다. 남의 흠을 들추어 헐뜯는 것 또한 남을 할퀴는 일일 것이다. 수행은 씨를 키우는 것이라고 했다. 마음의 씨를 잘 키워 자애로운 마음을 이웃에게 나눌 것을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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