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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끝 풍경소리가 슬픈 까닭은?
■한 그릇
중국의 동산 스님이 수행을 위해 길을 떠날 참이었습니다. 동산은 스승인 운암 선사를 찾아가 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동산이 물었습니다.
“스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누가 스님의 초상화를 그려보라고 하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당돌하기 짝이 없는 질문입니다. 제자가 감히 스승에게 “당신은 어떻게 생겼소?” “당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디요?” “당신의 견처(見處)가 어디요?”라고 물은 셈입니다. 선가(禪家)의 전통에서 깨달음을 묻고 답할 때는 나이의 많고 적음, 지위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인간과 한 인간으로서 주고받는 삶에 대한 본질적 물음과 답이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물음 앞에서 운암 선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오직 이것이 이것이라고 말하려무나.”
■두 그릇
동산 스님은 알쏭달쏭했습니다. “오직 이것이 이것”이라니 대체 무슨 뜻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간단치 않은 화두였습니다. 길을 떠난 동산은 내내 그 생각만 했습니다. 걸을 때도, 밥 먹을 때도, 앉아서도, 누워서도 그랬습니다.
길을 가던 동산은 작은 개울을 만났습니다. 졸졸졸, 흐르는 개울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중간쯤 갔을 때 동산은 문득 아래를 쳐다봤습니다. 거기에는 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그 순간 동산은 크게 깨쳤습니다. 그리고 ‘과수게(過水偈)’라는 유명한 게송을 남겼습니다.
“부디 밖으로 구하지 말라.
그럴수록 더욱 나와 멀어지리라.”
‘과수게(過水偈)’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개울을 건너며 부른 노래입니다. 또 하나는 차안(이 언덕)에서 피안(저 언덕)으로 삶의 강물을 건너가는 깨달음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오직 이것이 이것”이란 운암 선사의 말과 “밖으로 구하지 말라”는 동산 선사의 말은 무엇이 통하는 걸까요.
■세 그릇
예전에 TV에서 숭산 스님의 제자인 현각 스님의 금강경 법문을 봤습니다. 현각 스님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주장자를 ‘꽝!’하고 내려쳤습니다. 법문을 듣던 대중이 깜짝 놀랐습니다. 법당이 순식간에 조~용해졌습니다. 침묵이 촤악 흘렀습니다. 그때 현각 스님은 “이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현각 스님은 또 법문을 이어가다가 “쉿!”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침묵이 흘렀습니다. 처마 끝 풍경 소리만 딸~랑, 딸~랑 하고 울렸습니다. 현각 스님은 “저 소리, 바로 이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이것에서 더 멀어질 뿐”이라고 말입니다.
운암의 오직 이것이 이것, 동산의 밖으로 구하지 말라, 현각의 바로 이것. 셋은 서로 통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게 과연 뭘까요.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풍경소리를 들었는데, 누구에게는 ‘이것이 이것’이 되고, 또 누구에게는 ‘이것이 저것’이 되는 걸까요.
■네 그릇
우리가 슬플 때는 어떻습니까. 처마 끝에서 들려오는 풍경소리는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지붕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은 우주가 나를 위해 울어주는 눈물처럼 보입니다. 세상 모든 풍경이 슬프게 보일 뿐입니다.
그럼 기쁠 때는 어떨까요. 처마 끝 풍경소리가 노래처럼 들립니다. 아름답기 짝이 없습니다. 그 옆에서 쫑알대는 새소리도 아름답기만 합니다. 그저 온갖 풍경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다면 풍경소리 자체가 슬픈 걸까요? 아닙니다. 그럼 풍경소리 자체가 기쁜 걸까요? 아닙니다. 내 마음이 슬프고, 내 마음이 기쁜 겁니다. 그럼 그 마음을 툭 내려놓으면 어떨까요. 슬픔을 툭 내려놓고 풍경소리를 들으면 어떨까요. 기쁨을 툭 내려놓고 풍경소리를 들으면 어떨까요. 그럼 본래의 풍경소리를 듣게 되겠지요.
인간의 삶은 기쁨(喜), 성냄(怒), 슬픔(哀), 즐거움(樂)이란 파도를 타면서 흘러갑니다. 그래서 한 순간도 출렁거리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기뻐서 출렁, 슬퍼서 출렁, 화가 나서 출렁, 즐거워서 출렁. 늘 출렁출렁 거립니다. 그래서 운암도, 동산도, 현각도 “다시 들어보라”고 하는 겁니다. 희로애락이라는 마음의 파도를 내려놓을 때 바다가 얼마나 잔잔한지 보라는 겁니다.
그럴 때 들리는 소리가 다름 아닌 “이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니 동산 선사의 게송처럼 밖에서 구할 일이 아닙니다. 밖에서 구하면 구할수록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을 아무리 비싸고 좋은 것으로 바꾸어도 소리는 바뀌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듣는 소리가 실은, 내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동산 스님이 운암 선사에게 ‘당신의 초상화’를 물었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어떻게 생겼소, 당신의 정체성은 대체 뭐요? 라고 물은 겁니다. 그 물음에 운암 선사는 “오직 이것이 이것”이라고 답했습니다. 희로애락으로 출렁거리는 삶의 파도가 몸을 비우면 무엇이 나타날까요. 그렇습니다. 본래의 바다입니다. 운암 선사는 그걸 보여준 겁니다.
만약 동산 스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초상화를 그려보라”고 하면 어떨까요. 우리는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
깨달음의 상징인 연꽃이 피어 있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도 이것이 이것이다.
중국 스님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저서 『생각의 씨앗을 심다』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만약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이제, 마음이 보이네』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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