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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법문
이제 제법 가을의 느낌이 있다. 해가 산과 바다의 수평선 너머로 지는 때가 조금씩 당겨지고 있다. 나뭇잎의 색감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물기가 차츰 마르고 있다. 옆집을 지날 때마다 나는 그 집 마당에 심어놓은 석류를 바라본다. 머잖아 석류는 더 익어서 껍질이 투박하게 툭, 하고 깨지고 터질 것이다. 그러면 그 속에 들어있던 붉은 보석의 석류알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풀벌레 소리는 더 가늘어졌다. 올해 가을에 반딧불이를 보게 된 것은 큰 기쁨이었다. 제주시 애월읍 장전리에 이사 와 산 지 석 달 만에 반딧불이를 만났다. 거의 몇십 년 만에 다시 반딧불이의 불빛을 보았다. 무화과나무로부터 날아온 반딧불이의 점등하는 불빛은 마치 푸른 옥(玉) 같았다. 그만큼 내 사는 동네의 자연이 사람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어쨌든 나는 반딧불이를 본 후로는 매일 가을밤으로 나가서 반딧불이를 기다리게 되었다. 물론 매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은행잎 떨어지는 가을밤에
은행나무 가지에 걸린 별 하나 따서
만지작거리다가
편지봉투에 넣어 너에게 보냈는데
받아보았는지 궁금하다
이 시는 정호승 시인의 시 ‘엽서’이다. 이 시에서처럼 잎이 물들어 떨어지면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은 더 짙어질 것이다. 가을을 그리움과 고독의 계절이라고 얘기하듯이 잎이 물들고, 잎이 떨어지면 우리의 마음에 그와 같은 정서는 점차 더 자리를 잡을 것이다.
가을에는 어떤 과일을 보든 그 과육에 단맛이 가득 들어있음을 짐작하게도 된다. 가을은 그 끝까지 사과이든 배이든 모든 과일의 과육에 단맛을 더 채울 것이다. 과일 얘기를 하자니 ‘백유경’의 한 비유가 생각난다. 옛날에 망고가 먹고 싶어진 한 부자가 사람을 시켜 과수원에서 망고를 사오게 했다. 그 사람이 과수원에 도착하자 과수원 주인은 “이곳 과수원에 있는 망고들은 맛이 없는 게 없습니다. 맛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하나하나 직접 맛을 본 다음에 사겠다면서 망고마다 한 입씩 베어 물어 먹어본 다음에 망고를 샀다. 그렇게 해서 망고를 한 바구니 사서 집으로 돌아와 부자에게 보였더니 부자는 그 사람이 입으로 벤 자국이 있는 망고를 보고선 역정이 나고 거슬리게 싫어서 차마 먹지 못해 모두 버리게 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에 대한 비유가 아닐 수 없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도 이 가을을 살면서, 물드는 나뭇잎과 끝내는 떨어질 나뭇잎을 보면서도 인생의 늙음과 죽음과 같은 쇠락과 조락에 대해 더러는 깊이 생각하며 살고 있지 못하는 것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망고 과일을 하나하나씩 모두 다 입으로 베어 물어 먹어보아야만 그 맛을 비로소 알겠다는 듯이 말이다.
늙음과 죽음에 대해 설하신 부처님의 말씀은 매우 인상적이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난다야, 이제 내 나이 팔십에 접어들었다. 이 몸도 늙을대로 늙어 내 삶도 거의 끝나가고 있다. 마치 낡은 수레를 가죽 끈으로 얽어매어 지탱하고 있듯이 내 몸도 그와 같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몸의 늙음을 솔직하게 터놓고 이르셨다. 경전을 읽다 보면 곳곳에서 이런 대목을 볼 수 있다. “아난다야, 자리를 마련해다오. 내 지금 허리가 아프니, 여기서 좀 쉬어야겠다.”라고 말씀하시거나 “아난다야, 가사를 넷으로 접어서 깔아다오. 내가 좀 피곤하니 잠시 쉬어야겠다.”라고 말씀하신다. 부처님께서 열반이 임박했음을 선언하실 때에도 “세상은 덧없고 무상하다. 나는 석 달 뒤에 임종에 들 것이다. 나도 이제 늙었다. 내 생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이제 홀로 떠날 것이다. 너희는 자신을 잘 닦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열반을 대하는 비구들의 태도도 둘로 나뉘었다. 번뇌를 해탈하지 못한 비구들은 ‘붓다는 가셨다. 이제 세상의 빛은 사라졌다.’라고 생각하면서 두 팔을 뻗고 슬프게 울면서 땅 위에 이리저리 뒹굴었다고 하고, 이미 번뇌로부터 벗어난 아라한들은 ‘인연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은 무상하거늘 해탈하지 못한 자가 어쩌리오.’라고 생각하면서 슬픔을 거두었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무상 법문 중에는 비유가 아주 빼어난 말씀이 있다. “이 온갖 사물은 다 없어질 것이어서 공중의 번개 같고, 굽지 않은 질그릇, 빌린 물건, 썩은 풀로 엮은 울타리, 모래로 된 기슭과 같다. 이것들은 인연에 의존하고 있을 뿐 견실성이 없다.” 이 말씀을 새겨들으면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생멸이 있다는 것을, 처음과 뒤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을의 법문은 무상 법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고, 예외 없이 모든 것은 무너지게 마련이라는 것을 가을은 초목의 잎이 마르고 시들어 떨어지는 것을 통해 보여준다. 흥(興)하면 으레 쇠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내 가는 길을 묻지 마세요
왜 울고 가느냐고 묻지 마세요
언제 다시 돌아오느냐고도 묻지 마세요
겨울이 가고 또 가을이 가면
언젠가는 그대 실뿌리 곁에
살며시 살며시 누워 있겠어요
이 시는 앞서 인용한 정호승 시인의 또 다른 시 ‘낙엽’이다. 가을의 끝에서 우리는 이 시를 노래하게 될 것이다.
문태준(文泰俊)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처서(處暑)」 외 9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애지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BBS 제주불교방송 총괄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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