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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백성호의 국수가게

내 마음에도 블랙홀이 있다

  • 입력 2021.11.01

■한 그릇

 

천체물리학에서 아직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하나 있습니다. 다름 아닌 블랙홀입니다. 과학자들이 블랙홀에 붙인 별명부터 사납습니다. 그게 뭐냐고요? ‘우주의 괴물’입니다. 블랙홀이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우주의 괴물’이라고 이름 붙인 걸까요.

 

블랙홀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아인슈타인입니다. 물론 그때는 ‘블랙홀’이란 이름조차 없었습니다. 블랙홀은 어마어마한 힘으로 모든 걸 빨아들입니다. 빛은 물론이고 시간과 공간까지 후루룩 마셔버립니다. 블랙홀을 처음 발견한 아인슈타인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고요? 과학자는 자연과 우주의 이치를 밝혀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블랙홀에서는 시간과 공간마저 뒤엉켜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밝혀낸 과학적 진실이 오히려 뒤죽박죽 돼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블랙홀을 향해 “자연의 법칙이 피해야할 저주”라고 평했습니다.  

블랙홀을 그린 상상도

■두 그릇
 
블랙홀이란 존재가 발견된 후 오랫동안 블랙홀은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행여 그 블랙홀이 지구 근처에라도 온다면 지구를 몽땅 집어삼킬지도 모르니까요. 실제 그런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계에서 가장 가까운 은하가 안드로메다입니다. 과학자들은 안드로메다 은하의 중심에 블랙홀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때 많은 과학자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안드로메다는 지구가 속한 은하계를 향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으니까요. 
 
세월이 더 흐른 뒤 충격적인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계의 중심에도 블랙홀이 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그걸 발견한 과학자의 심장이 얼어붙지 않았을까요. 지구가 ‘우주의 괴물’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셈이니까요. 저 먼 은하에 폭탄이 있다고 여겼는데, 알고 보니 그게 우리집 안방에 있는 격입니다. 


 
■세 그릇
 
요즘은 블랙홀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수수께끼 투성이지만 말입니다.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블랙홀이 빨아들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내뿜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실제 빛까지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무언가 배출하기도 한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과학자들은 오랫동안 우주에 블랙홀이 있다면 화이트홀도 있을 거라고 봤습니다. 모든 걸 빨아들이는 통로가 블랙홀이라면, 화이트홀은 모든 걸 내뿜는 통로입니다. 아직까지 화이트홀의 존재가 입증된 적은 없습니다. 화이트홀은 상상 속의 존재로만 남아 있습니다.


 
■네 그릇
 
동양에서는 예부터 사람을 우주에 빗대는 사유를 했습니다. 거대 천체가 대우주라면, 사람을 소우주라 불렀습니다. 동양 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도 결국 소우주와 대우주가 서로 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걸 통해 사람이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이라 봅니다. 
사람에게도 그러한 블랙홀과 화이트홀이 있습니다. 인체에서는 저는 그게 숨구멍이라고 봅니다. “후~우~!”하고 숨을 길게 내뱉어 보세요. 그리고 참아보세요. 1분, 2분도 참기 힘듭니다. 그런 뒤에는 “후웁”하고 숨을 들이키게 마련입니다. 살아야 하니까요. 살려면 숨을 쉬어야 하니까요.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그게 계속 이어질 때 우리는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블랙홀과 화이트홀은 둘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다만 숨을 들이마실 때는 블랙홀이 되고, 숨을 내쉴 때는 화이트홀이 될 뿐입니다.
 
우주의 블랙홀도 마찬가지입니다. 들이마실 때는 블랙홀이 되고, 내쉴 때는 화이트홀이 되니까요. 이쪽에서 보면 블랙홀, 저쪽에서 보면 화이트홀이 되는 셈입니다.  

 

■다섯 그릇
 
사람에게만 블랙홀이 있는 게 아닙니다. 불교에도 블랙홀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부처의 자리를 ‘공(空)’이라 부릅니다. 실제 이 우주의 근본자리를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空)에서 무언가 창조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손에 잡히고 마음으로 느껴지는 무언가가 생겨납니다. 불교에서는 그걸 ‘색(色)’이라고 부릅니다. 
불교에서 보는 우주 법계는 공(空)과 색(色)이 끝없이 들락날락하면서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현대과학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양자역학에서도 이 이치는 고스란히 통용됩니다. 그래서 색이 공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블랙홀이고, 공에서 색이 나오는 통로는 화이트홀이 됩니다. 이름이 서로 다를 뿐, 사실은 하나의 통로입니다. 
 
이러한 블랙홀의 이치는 마음공부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의 감정을 하나씩의 별이라고 해볼까요. 모든 별은 블랙홀에서 나와, 나름의 궤도를 돌고, 다시 블랙홀로 사라집니다. 이 세상에 블랙홀로 돌아가지 않는 감정이란 없습니다. 그런 별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감정의 파괴를 거부합니다. “어떻게 이 아픔과 고통을 잊을 수 있어?” 그렇게 별들을 붙듭니다. 꽉 쥐고서 놓아주질 않습니다. 미움이나 집착, 원망이나 후회로 인해 생겨난 우리의 감정을 다시 블랙홀로 되돌리지 않습니다. 나의 고집이란 강력한 중력을 만들어서 블랙홀에 맞섭니다. 
 
그렇게 10년, 20년, 30년이 지나가기도 합니다. 나중에는 그 감정이 돌처럼 굳어져서 가슴에 박힙니다. 그렇게 병이 됩니다. “생겨난 모든 것은 소멸하게 마련이다”는 우주의 이치를 우리가 거스르며 살기 때문입니다. 
 
알면 알수록 블랙홀은 ‘우주의 괴물’이 아닙니다. 들숨과 날숨이 있어야 우주가 숨을 쉽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줄 알아야 숨통이 트입니다. 삶의 숨통 말입니다. 우리의 감정도 그렇습니다. 온갖 희로애락의 별들이 생겨나고, 나름의 궤도를 돌면서 작용하고, 다시 블랙홀로 사라지면 됩니다. 기쁨의 감정이든, 슬픔의 감정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숨을 쉬니까요.

밤하늘의 별을 그린 고흐의 작품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 / 캔버스에 유채 / 72.5x92cm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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