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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버스를 기다리며
최근 내 머릿속에 돌고 도는 문장들이 있다. 이 문장들은 긴 여운을 갖고 있다. 이 문장들은 의자를 놓고 내 마음속에 앉아 있다.
하나는 최하림 시인의 시 ‘저녁 바람’의 일부이다.
“나는 빈 광주리 같은 가슴이 되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나는 여기 그냥 이대로 서서 바람을/ 맞으며 그들이 잠시/ 우리 기억 속으로 들어와 흰/ 날갯짓을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에 등장하는 “빈 광주리 같은 가슴”이라는 시구이다. 이 시구는 처연한 고요가 느껴진다. 조금은 허전한 듯도 하고, 조금은 한가한 듯도 하고, 조금은 쓸쓸한 듯도 한 이 문장이 곱십을수록 좋다. 그래, 우리들은 가슴에 너무 많은 것들을 담아놓고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 하나의 문장은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에서 닷키나기리로 가실 적에 길을 따라 잘 정리된 마가다 국의 넓은 들판을 보시고선 아난다에게 하신 말씀의 내용이다.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아난다야, 경지 정리가 잘 된 마가다의 들판이 보이느냐?” 아난다가 “예, 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야, 비구들의 가사도 저 들판처럼 만들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셨고, 아난다는 “예,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스님들께서 입는 가사를 경지 정리가 잘 된 마가다의 들판처럼 만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를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그것은 반듯하고, 잘 제어되어 있으며, 위엄을 갖춘, 경건한 어떤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싶었다. 가사의 외형이 그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가사를 입는 수행자의 마음 또한 그러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나는 이 두 문장을 통해 얼마간 내 삶을 돌아보았다. 너무 분주하지 않은지, 너무 잡념이 많지는 않은지,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위의를 갖추고 사는 일에 소홀함이 없는지를 돌아보았다.
요즘 나는 가끔 일부러 시골 버스를 탄다. 시골 버스는 아주 먼 데서 온다. 제주 한림에서 출발해 귀덕 3리를 지나, 어음리를 지나, 봉성리를 지나, 납읍리를 지나, 용흘리를 지나 내가 사는 장전리로 온다. 장전리를 떠나가면 무수천을 지나, 월산마을을 지나, 정존마을을 지나, 종점인 제주버스터미널을 향해 간다. 이 노선의 중간에는 청용사와 흥국사와 극락사가 있다.
버스는 한 시간에 한 차례 온다. 버스가 장전리에 도착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으나 그 시각에 꼭 맞춰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좀 일찍 오거나 좀 늦게 온다. 버스에 손님들이 꽉 차 버스 안이 시끌시끌할 때도 있고, 손님들이 적어 버스 안이 한산할 때도 있다. 나는 버스가 도착하는 예정 시간보다 10분쯤 먼저 나가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가 내게 오려면 휘어진 굽이길을 돌아서 와야 하므로 버스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내가 선 자리에서는 알 수가 없다.
버스가 오기 전에 많은 승용차들과 트럭과 자전거와 경운기가 나를 지나간다. 나는 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차량들과 사람들이 나를 지나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다. 고개를 들어 구름이 이동하는 것도 때때로 보고, 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바라본다. 구름과 바람은 물처럼 흘러온다. 일정한 모양이 없이 때로는 헝클어진 상태로 때로는 잘 빗겨진 머리카락처럼 온다. 그러면 나는 내 삶의 시간도 이처럼 온다고 생각해본다. 흘러와서 흘러간다고 생각해본다. 어떤 일이 좀 이르게 올 때도 있고, 한꺼번에 올 때도 있고, 좀 더디게 올 때도 있고, 웃음과 기쁨을 가져올 때도 있고, 먹구름과 빗방울처럼 걱정과 슬픔을 동반하여 올 때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버스처럼 타고 어딘가로, 미래의 시간을 향해 나아간다. 마치 버스가 제주버스터미널을 향해 가듯이.
버스 안에서도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연세가 많으신 어른도 있고, 직장인도 있고, 학생도 있다. 등에 가방을 멘 사람도 있고, 산나물 보따리를 들고 탄 사람도 있고, 귤을 따서 시장에 팔러 나가는 사람도 있다. 이 승객들은 서로 아는 사이도 있고 초면인 사이도 있다. 이 버스 안은 언뜻 보면 하나의 세계와 다름이 없다. 대신 나는 먼 데서 오는 버스를 기다리며 내가 서 있는 현재를 돌아보고 명상을 하듯이 이동하고 흐르는 풍경을 바라본다. 영원한 것은 없다. 아끼는 물건은 점차 사라지고, 사람의 몸도 노쇠해지니 그것을 근심하거나 괴로워하지 말자는 생각을 해본다.
앞서 인용한 최하림 시인은 ‘병상에서’라는 시를 통해 병을 앓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면서도 병원의 병동에서 삶의 의지를 발견했다. 시인은 이렇게 썼다.
“붉은 해가/ 담벽에 걸리는 시간이면 나무들이/ 몸채로 빛나고 아무리 작은 움직임조차도/ 정적에 싸여 신성을 내뿜는다 나는 충만한/ 기다림으로 햇빛을 받고 있는 병동과/ 플라타너스와 의자들, 그리고 저만큼/ 하늘을 흔들며 날아가는 새들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것들을)/ 벅찬 가슴으로 본다”라고 썼다. 가을을 살면서 나를 지나가는 시간과 사람들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러기에 가을은 너무 알맞은 시간이다.
문태준(文泰俊)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처서(處暑)」 외 9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애지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BBS 제주불교방송 총괄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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