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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백성호의 국수가게

달마 대사 “거기에 부처는 없다!”

  • 입력 2021.12.01

한 그릇

 

달마 대사는 인도 사람이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로부터 내려오는 깨달음의 법맥을 이은 사람입니다. 그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선(禪)불교를 전했습니다. 그 이전에도 중국에는 이미 불교가 전래돼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찰을 짓고, 탑을 올리고, 경전을 간행하는데 치중해 있었습니다. 달마가 인도에서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깨달음’과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론이 선불교였습니다.  

 

달마 대사의 대표적 저서인 『혈맥론(血脈論)』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경전을 외우면 똑똑해질 것이다. 계율을 잘 지키면 다음 생에 천당에서 태어날 것이다. 남에게 베풀면 복을 받을 것이다. 모두 다 훌륭한 일이다. 그런데 어떡하나? 거기에는 부처가 없는데.”

 

달마 대사의 이 말을 듣고 화가 나는 불교 신자도 있을 터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불교 신자도 있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종교는 일종의 고속도로입니다. 그 길에서 어떤 사람은 이정표만 들고 있고, 어떤 사람은 가드 레일만 붙들고 있고, 어떤 사람은 직접 바퀴를 굴려서 길을 갑니다. 

 

밖에서 보면 다 같은 불교 신자이지만, 그들이 종교의 고속도로에서 하고 있는 일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이건 비단 불교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도교, 유교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종교에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요.

 

 

 

달마 대사


두 그릇

 

달마 대사가  『혈맥론』에서 말한 내용은 일종의 ‘경고등’입니다. 가령 종교라는 고속도로에서 이정표만 붙들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입니다. 불교에서는 그 이정표가 뭘까요. 맞습니다. 경전입니다. 팔만사천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경전입니다. 경전이란 부산에 도착해 본 사람이 기록해 둔 지도입니다. 어떡하면 부산으로 갈 수 있는지, 자세한 길이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이정표만 달달 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엄경, 법화경, 금강경, 반야심경, 천수경 등 온갖 경전을 외우고, 분석하고, 해석하면서 마치 부산에 닿은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령 고속도로 위에서 다섯 개, 혹은 열 개, 아니면 백 개의 이정표를 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그 이정표 덕분에 부산에 얼마나 가까워졌을까요. 

 

그렇습니다.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그는 부산으로 가는 방향만 가리켰지, 직접 발을 떼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럼 불교의 경전은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일까요. 오로지 선방에 앉아 좌선만 하며 마음의 바퀴만 굴리면 되는 걸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가려면 방향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서울에서만 살아봤지, 부산에 직접 가본 적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 자칫하면 부산이 아니라 강릉이나 목포로 가버릴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강릉이나 목포에 머물면서 마치 부산에 닿은 것처럼 착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부처’를 자처하며 거짓 깨달음의 소리를 내놓고는 합니다. 

 

 

 

 

 

세 그릇

 

종교의 고속도로에서 계율을 최우선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대교가 특히 그렇습니다. 그들은 613개에 달하는 율법만 지키면 천국에 간다고 믿습니다. 그게 유대인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라고 믿습니다. 불교에서도 계율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들이 일부 있습니다. 

 

종교에서 계율이나 율법이 대체 뭘까요? 그건 일종의 가드레일입니다. 고속도로에서 자동차가 바깥으로 튀어나가지 않도록 보호하는 가드레일 말입니다. 그게 있기에 우리는 한 눈 팔지 않고 바퀴를 계속 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율이나 율법에 유독 집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고속도로 위에서 가드레일만 붙들고 있는 셈입니다.  

 

가드레일을 제아무리 세게 붙들고 있어도, 그게 우리를 부산으로 가게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제자리 걸음만 할 뿐입니다. 고속도로 밖으로 나가진 않겠지만, 부산을 향해 굴러가지도 못합니다.

 


네 그릇

 

달마 대사는 “남에게 베풀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열 개를 베풀면 결국 열 개 이상이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물질로든, 아니면 마음으로든 말입니다. 그런데 베푸는 일, 그 자체가 불교의 존재 이유는 아닙니다. 왜냐고요? 베풀기만으로 우리가 생사에서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했고,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리수 아래 앉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달마 대사는 “거기에는 부처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경전을 외우는 일도, 계율을 잘 지키는 일도, 남에게 베푸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체가 부처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모두가 쓸모없는 일일까요? 아닙니다. 경전도, 계율도, 남에게 베푸는 자비도 수행자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다만 달마 대사가 경고하는 건 거기에만 머물지 말라는 뜻입니다. 불교의 목적지는 부산이지, 광명이나 대전이나 대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부산에 닿을 수도 있고, 닿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목적지는 분명히 부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니면 내일, 내일 아니면 모레, 모레 아니면 그 다음날이 있으니까요. 

달마 대사는 『혈맥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상 속에서 움직이는 행동 모두가 본마음(本心)이다.”그러니 부산은 멀지 않습니다. 일상 속에서 말하고, 밥 먹고, 똥 누고, 생활하는 행동과 마음 모두가 부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걸 깊이 들여다보고, 깊이 궁리하고, 깊이 묻고, 깊이 답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걸 “마음 공부”라고 부릅니다.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저서 『생각의 씨앗을 심다』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만약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이제, 마음이 보이네』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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