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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를 살며 생각하며
가을이 지고 겨울이 들어서려고 한다. 일교차도 커졌고 햇살이 더 귀해졌다. 바깥에 나서면 제법 한기가 돈다. 이제는 무르익은 열매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래도 나는 아직 꾸지뽕 나무 아래에 가서 꾸지뽕 열매를 주우려고 이리저리 나무 밑을 꼼꼼하게 살핀다. 손에 쥐게 되는 열매의 수량이 극적으로 줄었다. 그리고 그 열매도 반은 새가 쪼아 먹다 떨어진 것이요, 또 개중 반은 기는 벌레들이 먹다 남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하여도 좋다. 새와 벌레와 내가 한 그루 꾸지뽕 나무의 열매를 나눠 먹는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한식구가 된 기분이 든다.
날마다 꾸지뽕 나무의 가지에 내려앉는 새를 바라보면서 최근에는 짧은 시도 지었다. 제목은 ‘새야’라고 달았다. “새야, 새로운 아침의 열쇠공인 새야/ 나도 좀 열어놓아 줘/ 더 붉고 달콤한, 가을의 마지막 열매를 따러 가기 전에/ 오늘을 높게 기뻐하는 새야”라고 써 새의 울음소리를 듣는 소회를 표현했다. 새의 소리는 천공(天空)에 반짝인다. 새는 일찍 날아와 꾸지뽕 나무 가지에 앉는다. 나무의 가지에 앉아 아침 햇살을 온몸에 받는다. 그리고 노래한다. 특유의 맑고 높고 깨끗한 음(音)으로. 티가 없이 아름다운 음으로.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아침이 더욱 신선하다. 이 소리를 듣고 있으면 자라던 생명들이 시들고 떨어지는 이 만추(晩秋)의 때가 쓸쓸하기만 한 것도, 허전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제주도 애월읍 장전리 동네에도 늦은 가을이 한창이다. 올해는 단풍이 곱게 물들지 않아 아쉬움이 없지 않다. 사람들은 올해는 아마도 마른 단풍을 보고 말 것 같다고 했다. 단풍의 색채를 입지 않고 잎들이 곧 질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몇몇 남아 매달린 감들이 있고, 노란 소국이 피어 진한 향기를 내보내고 있다.
계절이 바뀌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무화과 밭에 나와서 일을 하던 옆집 할머니는 요즘 무화과나무와 밭담을 감고 자라던 넝쿨을 걷어내고 있다. 마른 넝쿨의 계절이 이즈음인 것이다. 할머니는 장맛비가 쏟아지는 날이나 햇살이 데일 것처럼 뜨거운 날이나 늘 무화과 밭에서 살았다. 할머니는 많은 날 풀을 뽑았다. 무화과를 처음 따는 날에는 할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무화과 열매가 맺히고 익는 동안 계절이 바뀌었고, 그러는 동안에도 넝쿨은 자라났고, 이제 무화과나무에는 무화과 열매가 없는 빈 가지만 남았고, 넝쿨을 걷어낼 시간이 되었다. 그러니 지금 할머니가 걷어내고 있는 이 넝쿨에는 봄의 시간도, 장마의 시간도, 폭염의 시간도, 열매의 시간도 함께 들어 있는 셈이다. 넝쿨 하나에 그 오랜 시간이 집적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이 세상에 생명 있는 것들은 귀하지 않은 것이 없어 보였다.
“이만하면 되지 않았는가? 먼 들판을 바라본다. 어떤 망설임 앞에 선 낙수(落水)처럼, 망설임이라는 말 앞에 잠시 정차한다. (……) 어쩌면 우리 모두 그런 힘으로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남겨놓은 잔상. 누더기 옷을 입고도 더러 뽐을 냈으니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한겨울 새벽 화엄사 절집 앞에서 떠돌던 날도 있었다. 이마를 쓸고 가던 한 줄기 바람 때문에 내 인생을 송두리째 다른 무엇으로 거래하려던 날들. 호박잎은 둥글고 넓다. 온전히 비를 맞고 흔들리고 있다. 그 흔들림이 좋다”
이 시는 우대식 시인의 시 ‘잔상(殘像)’의 일부이다. 촛불을 한참 바라보다보면 두 눈을 감아도 그 촛불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와의 인연으로 인해 생겨난 일들의 잔상, 그 잔상의 힘으로 또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때때로 곧 떨어질 낙수처럼 삶에 대한 망설임과 두려움이 없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하니 걷어내는 넝쿨에 배어 있고, 또 담겨 있는 것도 지난날의 시간들의 모여 쌓임이요, 그 잔상일 테다.
어제와 오늘에는 아침에 일어나 ‘채근담’을 읽었다. “가을벌레든 봄새든 하나같이 우주의 오묘한 작용에 통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슬프다느니 기쁘다느니 하는 감정을 일으키는가. 오래된 고목이든 새로이 피어난 꽃이든 하나같이 살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것인데, 어찌하여 흉하다느니 예쁘다느니 하며 구별을 짓는가.” 가을벌레가 우는 소리나 새가 지저귀는 소리는 동일한 것이요, 고목이나 신생의 꽃은 동일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 모두가 동등하고 평등하다는 뜻이다. 왜 동등하고 평등하냐 하면 이 모두가 똑같이 생명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추를 살고 있고 곧 우리는 겨울의 때를 살게 될 것이고, 그러고 나면 마치 언덕을 넘어가듯이 봄의 계절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계절의 바뀜을 경험하면서 여러 결의 생각과 느낌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으나, 마른 잎에도 지난 계절이 쌓여 있으니 그 마른 잎에는 새순과 꽃이 들어 있다고 볼 일이요, 또 이렇게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른 잎과 저 지난 계절의 새순이 동일한 몸이요, 평등한 생명의 의지라는 것을 이해해야 할 일이다. 떨어진 잎이 나뒹구는 집 마당의 한쪽에서는 동백이 한 송이 한 송이 피어나고 있으니 이 모두가 이 세계에 함께 있는 셈이다.
문태준(文泰俊)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처서(處暑)」 외 9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애지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BBS 제주불교방송 총괄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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