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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를 바라보며
제주 애월읍 장전리 집에는 항아리가 몇 개 있다. 고향 시골집에서 얻어온 것부터 새로 산 것까지 내 집으로 항아리가 오게 된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아래위가 좁고 배가 부른 채 기울어 넘어질 듯 불안해 보이지만 결코 스스로는 옆으로 넘어진 적이 없는 안정적인 자세를 갖추고 각각의 쓰임에 맞게 앉아 있다. 땅에 묻혀 있는 항아리도 있고, 한데에 내놓은 것도 있다. 얼마 전에는 두 개의 항아리를 새로이 땅에 묻었다. 땅을 깊게 그리고 동그랗게 파서 항아리의 목만 땅 바깥으로 나오게끔 해서 항아리를 묻었다. 김치를 넣어둘 생각에서였다. 항아리 안을 한 번 더 깨끗하게 닦고 물기를 말리고 조심스럽게 땅속에 내려놓았는데,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을 저어보며 항아리 속의 온도를 가늠해보니 제법 서늘해져 있어서 참으로 신기한 느낌마저 들었다. 김치를 넣고 뚜껑을 덮고 항아리 주변의 흙을 정리하고 나니 마치 곳간 하나를 얻은 듯 기분이 풍성하니 좋아졌다.
김장 김치를 넣어두려 항아리를 묻는 일은 내 아버지께서도 해마다 하셨던 일이었다. 삽과 곡괭이로 뒷마당의 땅을 파서는 정말이지 집채만한 둥근 항아리를 묻었다. 겨울 내내 식구들이 먹을 김치를 넣어두기 위해서였다. 식구가 많았으므로 김치의 양도 많았고, 해서 항아리도 큰 항아리가 필요했다. 아버지께서 항아리를 묻을 땅을 파는 동안 나는 쪼그리고 앉아 지켜보았는데,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아버지께서는 땅을 파면서 땅속으로 내려가셔서 당신의 정수리가 안보일 정도에 이르렀을 때 항아리를 묻을 깊이를 얻으셨다. 항아리는 내놓았을 때에도 뭔가 넉넉해 보이고 인심이 좋아보이지만 땅에 묻었을 때에도 까탈스럽지 않고 푸근하다. 나는 항아리 속에 머리를 넣고 여러 소리를 내보기도 했는데, 항아리 내부에서 울리는 그 소리는 산울림보다 훨씬 울림이 크고, 곧바로 내 목소리를 받아주고, 내 목소리를 저음의 굵은 어른의 목소리로 만들어주었다. 물론 그게 신기해 너무 여러 번 하다 제지를 당했지만. 어릴 적에는 큰눈이 많아서 아버지께서는 눈 온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싸리의 가지를 묶어 만든 빗자루로 하얀 눈을 쓸어 항아리가 묻혀 있는 곳까지 이르는 길을 내놓으셨다. 그러면 나는 또 그 길을 따라 항아리에게 갔다 돌아오곤 했다. 어느 정도 컸을 때는 어머니께서 저녁밥을 지으면서 묻어둔 항아리에 가서 김치 좀 꺼내오라며 큰 대접을 내미시기도 했고, 그 말씀에 따라 깜깜하고 추운 겨울 저녁에 항아리 뚜껑을 열고 항아리 속에 손을 넣어 차가운 김치를 덜어내 오던 일이 자주 있었는데, 그 맵고 시원한 김치의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내 어머니의 항아리 사랑은 유별날 정도이다. 이사를 여러 번 했지만 깨지지 않고 아직도 시골집 장독대에 앉아 있는 항아리도 여럿이다. 된장을 담을 때는 물론이고 뭔가를 넣어 보관할 때에도 항아리를 이용하셨고, 수시로 물로 씻어 항아리를 깨끗한 상태로 두셨다. 항아리를 다시 사용하실 때에는 짚단에 불을 붙여 항아리의 내부에 불의 기운을 한 차례 넣은 다음에 사용하셨다.
그러나 지금 내 집에 있는 항아리들 가운데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항아리는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채 텃밭에 그냥 던져놓듯 놓아둔 항아리이다. 이 항아리는 속이 텅 빈, 작은 항아리이다. 쓸모를 찾지 않고 우연히 그냥 두게 된 항아리이다. 그런데 비가 갠 어느 날 아침에 보니 까치 한 마리가 이 항아리에 와서는 긴 부리로 물을 마시고 가는 것이었고, 그게 그 한 마리만 하는 일이 아니라 다른 까치와 다른 종류의 새들도 이 항아리에 와서 물로 목을 축이고 가는 것이었는데, 그 항아리에는 빗물이 고여 있되 검불이나 더러운 것이 가라앉아 맑고 고요한 수면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마치 작은 못처럼, 마치 무심과 무욕의 마음처럼 그렇게 놓여 있었지만 여태까지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 그때에서야 보게 되었고 그 후로는 이 항아리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것이었다.
게다가 항아리는 하나의 우주에 견줄만 했다. 항아리에는 고운 햇살이 담기고, 바람이 들어가고, 빗방울과 눈송이가 담긴다. 닭과 꿩이 우는 소리와 강아지가 짖는 소리와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와 환호의 음성이 함께 담긴다. 물이 쌓여서는 하늘을 담아내고, 이동하는 구름을 수면에 비쳐보인다. 바람이 격렬하게 회오리처럼 돌다 나가는 때가 있고, 땡볕에 항아리 속이 끓을 때가 있고, 혼자 달빛을 받으며 가을밤에 쓸쓸히 앉아 있는 때도 있다. 그러므로 이 항아리는 하나의 우주요, 또 어느 때에는 내 마음도 이 항아리와 같아 보여서 항아리는 내 내면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항아리를 바라보면 채우는 일과 덜어내는 일 혹은 비우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격정적인 것과 고요한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항아리를 바라보는 일은 그래서 잠깐 잠깐씩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되기도 한다. 물건이지만 오랜 시간 정을 붙이고 마음을 주고받다 보면 하나의 물건은 단순한 물건 그 자체가 아니게 된다. 공부와 수행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내게는 항아리가 그러하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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