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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불화산책

만오천불도(萬五千佛圖)의 화불, 나와 우주의 장엄한 만남을 상징

  • 입력 2022.01.01

만오천불도, 13세기 초, 일본 히로시마 후도인(不動院) 소장




<만오천불도(萬五千佛圖)>는 고려인에 의해 13세기 초쯤 그려진 불화이다. 불화의 크기는 세로 175.7cm 가로 87.6cm로 중형의 크기이다. 이 불화를 보면 먼저 화면 위쪽 테두리에 써진 ‘만오천불(萬五千佛)’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만오천불’ 글귀는 이 불화에 수없이 많이 그려진 작은 부처님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짐작한다. 

불교 미술사에서 1만5천 불을 표현한 가장 오래된 사례는 중국 낙양 용문석굴 제9동(만불동) 벽에 부조된 부처님상을 들 수 있다. 이 석굴 벽면에는 약 4cm 크기의 부처님상 1만 5천 명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천정에 조각된 커다란 연꽃문양의 테두리에는 “680년 11월 30일에 1만 5천 존상을 각각 감실에 봉안하였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작은 부처님상의 수가 1만 5천 명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작은 부처님상(이하 ‘화불’이라 칭함)은 고려 불화 <만오천불도>처럼 부처님의 옷(이하 ‘법의’라 칭함) 위에 새기지 않고 벽에 조각되어 있다. 

화불(化佛)이 부처님의 법의(法衣) 위에 표현된 사례는 중국 운강석굴의 담요5굴 중 제18동에 조각된 여래입상을 들 수 있다. 이 여래상의 법의에는 화불이 빼곡히 조각되어 있다. 하지만 <만오천불도>는 화불이 본존의 법의에만 그려진 것이 아니라 화면의 바탕에도 촘촘히 그려져 있다. 여기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의 외곽선 안에도 화불을 그려 넣었고 화면 위에 적힌 ‘대평(大平)’ 글자의 내부에도 화불이 그려져 있다. 심지어 장황이라 불리는 그림 테두리와 테두리 위쪽 면에 적힌 ‘만오천불(萬五千佛)’ 글자의 내부에도 화불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1만 5천 화불이 모두 선정인(禪定印)의 손가짐을 하는 모습도 주목되는데 선정인은 선정(禪定)에 든 부처님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정인의 수인(手印)과 수많은 화불의 모습을 보면 이 불화의 주제와 불화를 그린 작가의 메시지에 관심을 끌게 한다. 

도대체 이 불화에 표현된 무수히 많은 화불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답은 아래 화엄경의 경구(經句)에서 찾을 수 있다. 

“여래께서 보리좌에 계시는데 한 털 속에 시방 찰해 나타내 보이시고 하나하나의 털에 모두 여실히 드러냄도 이와 같으니 이러함이 법계에 두루 하도다. 낱낱의 세계 속에 모두 계시고 일체 세계의 땅에 두루 계시네.”

“부처님의 몸, 온 법계에 가득하시니, 간 데마다 중생 앞에 나타나시며 인연 따라 골고루 나아가지만 언제나 그 본체는 보리좌에 앉아 계신다. 여래의 하나하나 털구멍마다 온 세계의 티끌 수만큼의 부처님 앉아 계시네.”

“부처님의 큰 신통력을 획득하여 법계에 두루 편재하지 않는 데 없고 일체의 모든 국토의 티끌 수처럼 항상 구름같이 몸을 나투어 충만하고 두루 중생을 위하여 큰 광명을 놓고 각각 법의 비를 내려 그 마음에 응하네.”

화엄경 경구에 비추어 보면 화불은 한 부처님의 털 속에서 나타나 시방과 찰해를 드러내어 주는, 즉, 법계에 두루 계시는 수많은 부처님이다. 화불의 본존은 한 분으로 항상 보리좌에 앉아있지만, 화불은 인연 따라 중생 앞에 나타나며 법계에 가득하다. 화불은 법계에 무진 연기되어 있는 부처님이며, 인드라망의 연기 세계에 머물며 본존과 교섭하는 또 다른 본존이다. 즉, 화불은 본존과 동일체이다.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인 것이다. 화불(多)과 본존(一)은 하나이며 이러한 부처님을 이른바 법신 비로자나불이라 불린다. 특히, 본존은 항상 보리좌(깨달음의 자리)에 앉아 계신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모든 물질의 최소 단위의 미립자를 원자라고 한다. 원자의 성질은 원자핵을 둘러싸고 있는 전자의 행동에 따라 좌우된다. 원자를 포함해 미립자의 세계를 고찰해 보면, 물질의 근원인 소립자는 제각기 고유한 주파수를 가지며 독특한 파장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우리가 느끼고 살아가는 거시적 세계의 물질 개념과 양자역학의 미시적 세계관 사이에는 현재 물리학과 과학-수학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불일치 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소립자는 그 실체(실재)가 파장(에너지)의 형태로 존재하며, 파장의 형태를 취한 에너지는 서로 자유롭게 지속해서 교류하고, 그 에너지의 교류는 파동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도 않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단지, 파장은 관찰자의 간섭(緣)으로 인해 붕괴하여 하나의 존재 혹은 실체로 생성한다. 여기서 하나의 파동이 다른 파동과 일치되거나 조화를 이루면서 물리적 공명 현상이 일어난다. 즉, 양자역학의 원리가 불교의 연기론,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불이(不二)의 연기(緣起)적 세계관 등, 붓다의 깨달음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물리적 공명 현상은 생물학적 영역에서도 일어나는데, 1979년 프린스턴 대학 연구소 PEAR(Princeton Engineering Anomalies Research)는 실험을 통해 “인간의 의식은 외부 세계의 사건이나 경험들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라는 결론을 얻었다. UCLA대학의 알렌 쇼어(AllenSchore) 교수는 2001년도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부정적인 만남이나 감정을 겪은 후 몸에 활기가 없어지고 소극적으로 변하는 것은 뇌에서 코티졸(Cortisol)이라는 신경호르몬이 분비되어 우리 자신의 몸을 위축되게 한다”라고 하였다.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 행복한 기분에 드는 것은 신경전달 물질인 도파민과 옥시토신 호르몬의 분비에 의한 것임을 밝혀내었다. 뇌신경학자 캔더시퍼트 박사는 실험을 통해 “감정은 정보를 물리적 실체로 전환하는 과정에 관여하는 세포의 일종이다.”라고 결론을 내리며 만성 우울증 환자가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4배나 높다는 통계수치를 근거로 제시하였다. 아기는 촉각, 시각, 체온, 눈빛 등을 통해 엄마와 공감대를 형성한다. 한 아이가 울면 이를 보고 있는 옆의 아이도 따라서 울음을 터트리게 된다. 이러한 감정의 현상을 생명체의 변연계 공명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이치로 볼 때, 자(自)와 타(他)는 상호 간에 파동이란 형태로 공명할 수 있는 존재로 본질에서 서로 하나이다. 자타가 서로 공명으로 하나가 되는 존재라면 나의 파동이 상대에게 영향을 주고 반대로 상대의 파동이 나에게 영향을 준다. 만약 내가 행복한 마음(파동)에 들게 되면 상대도 행복한 마음을 얻게 될 것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자타 공명의 이치를 간파하고 ‘원공법계 제중생 자타일시 성불도 (願共法界 諸衆生 自他一時 成佛道)’를 설파하여 타인과 함께 행복하길 원하는 삶을 갖도록 하고 있다.
 
<만오천불도>는 우주만유가 천차만별이지만 모두 인연 따라 얽혀 있어서 그 무엇도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처님의 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의 가르침을 시각화시킨 불화이며 나와 우주가 둘이 아님을 가르쳐주는 장엄한 그림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만오천불도>에서 표현된 본존은 선정에 든 나(自)이고 화면 전체에 빼곡하게 그려진 화불은 우주(他)와 함께하는 나(自)라고 할 수 있다. 

<만오천불도>는 내가 세상과 인연이 되어 궁극적으로 둘이 아닌 존재임을 깨닫고 내가 행복하길 바라듯 그들도 행복하길 바랄 때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화불과 본존의 관계를 통해 보여준 것은 아닐까?


 

박경귀 (불교조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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