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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불화, 공동작업으로 공공의 염원 담아내
해인사 영산회상도 1729 의겸義謙
쌍계사 대법당 삼세불도 1781 승윤勝允 평삼評三 함식咸識
조선 시대는 불화를 왜 스님들이 그렸나?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조선의 승려 장인’ 특별전을 보았다. 유물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전시 형식과 달리 불교미술 작가를 중점적으로 조명한 전시여서 관심이 끌렸다. 특히 조선 시대에 활동했던 불상과 불화작가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전시하고 있어서 불교미술 조형 작가인 나로서는 꼭 관람하고 싶었던 전시였다. 전시 기획자의 말에 따르면 불교미술 제작 주체로서 승려 장인을 위치시키고 수공업 사회였던 조선 시대에 승려 장인을 생산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에 전시의 주안점을 두었다고 한다. 또한, 승려 장인 집단에서 생산한 제작물이 대부분 당시 사회의 필요와 요구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다수에게 문화적 향유를 할 수 있게 한 일종의 공공 미술적인 성격이 있는 점도 전시를 관람하며 확인할 수 있길 바랐다고 한다. 이러한 전시 의도들은 이 전시에 대한 나의 관심을 증폭시켰고 오전에 관람을 시작해서 전시 종료 시각이 다 돼서야 나올 수 있었다. 특히, 1729년 제작한 <해인사 영산회상도>를 직접 보면서 느꼈던 감흥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 불화는 당대 유명한 화승인 의겸스님의 주도하에 11명의 화승이 함께 공동으로 제작한 불화이다. 또 한 점의 명작 불화로 현재는 폐사된 안음 영취사에 1742년 봉안한 <영취사 영산회상도>를 만난 것도 잊을 수 없는데, 이 불화도 화승 혜식스님의 지휘 아래 6명의 화승이 함께 공동으로 제작한 불화이다. 조선 시대의 불화는 대부분 스님이 그렸다. 그것도 집단을 이루어 공동작업으로 제작하였다. 왜 조선 시대에는 불화를 스님이 그렸을까? 그것도 집단을 이루어 공동작업으로 제작되었을까?
조선 시대에 그려진 불화는 대부분 화승이라 불리는 승려 화가에 의해 그려졌다. 왜 스님들이 불화를 그리게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억불숭유로 인해 자립해야 했던 사찰의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스님들이 갑계 등, 사찰계를 조직하며 사찰의 대소 불사를 서로 상부상조하며 이어갔다. 이는 억불숭유에 따른 스님들의 자구책이었다. 불화도 이렇게 자구적 차원에서 소질 있는 스님들이 중심이 되어 불화제작 집단을 구성하여 직접 제작하기 시작했을 개연성이 있다. 조선 시대에 승려가 불화를 주도적으로 그린 것은 동시대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특수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불상이나 불화를 제작하는 승려 장인의 수가 5천 명이 넘는 등 사찰 경제가 어려웠던 시기 임에도 전 시기와 달리 불교미술 제작자의 수는 크게 늘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 화승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17세기 조선 사회는 정치적 요인과 기후적 요인으로 인하여 급격한 인구감소를 경험하였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큰 전란이 있었다. 중반기 이후에는 일조량 감소 및 낮은 기온과 같은 기상이변이 속출하여 세기말까지 농작물의 생산 감소와 기근이 발생하였다. 특히, 1670년에서 1671년의 경신대기근에는 사망자가 100만이 넘을 정도로 사상 유례가 없는 대재앙의 시기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전쟁과 경신년에 발생한 대기근으로 수많은 사람이 가족을 잃은 슬픔과 굶주림의 공포에 빠졌다. 이 시기에 사찰에는 명부전이 많이 건립되었고 천도재나 영산재가 성행하였던 점으로 볼 때 이들이 불교에 의지하며 슬픔과 공포를 달래려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불교는 이들의 슬픔과 공포를 불교의식을 통해서 달래주었고 의식에 필요한 불화의 수요가 급증하며 화승의 수도 급격히 증가하였을 것이다.
화승, 공동작업으로 서로 조형적 자극받으며 작가적 역량 키워
조선 시대의 불화는 위계를 갖춘 승려 화가 조직에 의해 공동으로 제작되었다. 즉, 불화제작을 총괄하는 금어, 밑그림을 그리고 일반화원을 지휘하는 편수, 물감을 만들고 채색 등을 수행하는 화원 등으로 각각 분야를 나누어 작업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1781년에 하동 쌍계사 대웅전에 봉안한 <삼세불도>를 제작한 화승 조직을 살펴보면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불화는 승려 화가 21명이 참여하여 공동으로 그렸는데 금어, 편수, 화원으로 화승 조직을 구성하여 불화를 제작하였다. 직접 불화를 그리는 스님 이외에도 증사, 송주, 화주, 공양주 스님 등 불화제작을 원활히 마칠 수 있게 도와주는 스님도 16명이 있었다. 이렇게 따져보면 쌍계사 대웅전에 봉안한 불화는 총 37명이 공동으로 제작한 셈이 되는 것이다. 이 시기 다른 사찰의 불화도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위계를 갖춘 조직 안에서 공동으로 제작하는 방식은 같았다.
평생을 화승으로 살아온 조선 후기의 화승 평삼스님의 화업 일생을 살펴보면 조선 시대 화승 조직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더욱 자세히 알 수 있다. 화악당 평삼스님은 스승인 비현스님의 화승 조직에서 약 15년간 불화를 배우는 수련기를 가진 후 독립하여 30년간 독자적인 화승조직을 이끌며 활동했다. 평삼스님은 스승이 이끄는 화승 집단에서 선배 괘윤스님과 후배 함식스님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수련기를 보냈다. 스님은 스승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에 선배인 쾌윤스님이 독립하며 구성한 화승 집단에 참여하여 불화를 그리기도 하고 후배인 함식스님을 자신이 독립하며 구성한 화승 조직에 불러 불화를 공동으로 제작하기도 하였다. 평삼스님은 수련기를 마치는 시기에 한 스승 밑에 있었던 선후배끼리 서로 협업하고 경쟁하며 작가적 역량을 키워갈 수 있었다. 이들은 이렇게 스승의 곁을 떠나 각자 화승 조직을 이끄는 수화승으로 성장하였고 평삼스님도 찰민스님을 수제자로 화승 집단을 구성하여 약 30년간 자신의 책임하에 불화를 그렸다.
이렇게 불화제작 집단은 스승과 제자, 선후배로 위계적 체계를 이루어 공동으로 불화를 조성했다. 화승 조직 속에서 스승은 제자에게 불화의 내용과 기법을 전수하고 선후배들은 서로 작업에 자극을 주고 경쟁하며 뛰어난 화승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독립한 제자들은 새로운 화승 집단을 구성하여 스승의 화풍을 이어나가는 동시에 각자 자신만의 화법을 계발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이렇게 조선 시대 화승은 불화제작 집단에 속해 공동으로 불화를 제작하며 조형적으로 서로에게 자극을 주고 경쟁하며 개성 있는 불화를 그려 낼 수 있었다.
화승 집단 간 협업으로 탄생한 불화, 대중의 염원 담은 공공미술 작품
조선 시대에는 각 지역을 대표하는 화승 조직이 있었고 이들은 서로 협업을 통해 기법과 화풍을 교류하며 동시대에 사람들의 염원에 걸맞은 내용과 양식을 도출해 내었다. 위계와 협업으로 불화를 제작하는 화승 집단의 체계 속에서는 불화의 내용과 기법이 화승 개인의 사적 의욕에 의해 표현할 수 없었다, 때문에, 화승은 불화의 구성과 표현을 모색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제작을 의뢰한 사람에게 답을 찾게 되었다. 조선 시대는 불화 조성을 위한 자금이 많은 사람의 참여를 통해 마련되었다. 시주자들은 대부분 평민계급이어서 이들의 바람이 불화에 담기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 처음 등장한 괘불화와 감로도는 이 시대의 염원을 담아 그려진 대표적인 불화로 괘불화의 거대한 크기는 그들의 구세의 염원을, 감로도는 그림 속에 그들의 삶을 담아냈다. 즉, 공동작업 체계의 제작방식은 자연스럽게 동시대의 사회적 염원에 시선을 두게 되면서 시대의 염원이 담긴 불화를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고 당시의 사람들은 이러한 불화를 바라보며 가족을 잃은 슬픈 마음을 위로받고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의 불화가 일종의 공공 미술의 역할을 한 것이다.
조선 시대 대중의 염원을 직접 확인하고 싶다면 이러한 염원을 담은 조선 불화를 다시 한번 보기 바라며 그런 불화를 그린 화승을 기억하길 원한다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3월 6일까지 진행하는 ‘조선의 승려 장인’ 특별전의 관람을 권해 본다.
박경귀 (불교조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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