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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문태준의 세상사는 이야기

봄맞이 일력

  • 입력 2022.03.01
이제 곧 봄이 돌아올 것이다. 얼음은 녹고, 언 땅은 풀리고, 싹은 올라올 것이다. 나는 수양버들 가지에 버들개지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것을 졸시 ‘봄’을 통해 노래한 적이 있다. 

“휘어진 수양버들 가지에/ 봄빛은/ 새는/ 노래하네// 간지럽게/ 뿌리도/ 연못의 눈꺼풀도/ 간지럽게// 수양버들은/ 버들잎에서 눈 뜨네/ 몸이 간지러워/ 끝마다/ 살짝살짝 눈 뜨네”라고 썼다. 

봄기운의 일어남을 간지러운 몸에 견주었고 봄에는 나무의 뿌리뿐만 아니라 살얼음이 꺼진 연못의 수면도 간지럽다고 썼다. 이제 저 모퉁이만 돌아가면 봄이 보일 것 같다.
얼마 전에는 오일장에 가서 심을 화초와 씨앗을 구하기도 했다. 제주시에 오일장은 2일과 7일에 열린다. 내가 가장 먼저 가는 곳은 묘목과 화초와 모종과 구근과 씨앗을 파는 곳이다. 더러는 직접 호미와 곡괭이를 만들어 파는 대장간에 들르기도 한다. 아직은 농사가 서툴기 때문에 오일장에 가거나 화원에 가거나 농약사에 가서 절기마다 심을 것들과 미리 해야 할 일들을 알아보곤 한다. 농사일지도 적고 있다. 귤나무와 동백나무에 약을 치는 일도 미리 날짜를 받아 두었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도 텃밭에 뭔가를 심거든 내게도 알려달라는 말씀을 드려놓았다.
꽤 여러 날 전에 튤립 구근과 수선화 구근을 심었는데, 그 싹이 올라오는지를 매일매일 살펴보고 있지만 아직은 감감무소식이다. 흙속에서 많은 일들을 하고 있을 줄로 믿지만 나는 또 조바심을 내는 것이다. 툇마루도 연신 걸레로 닦아 놓아 그곳에 봄볕이 내리길 기다리고 있고, 또 툇마루에 새로 칠을 하려고 필요한 것들을 구해도 놓았다. 들여놓았던 장화를 씻어 내놓았고, 작업용 장갑도 구해 놓았다. 전정할 날도 셈하고 있다. 나의 봄맞이 준비는 한창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봄맞이 일력에는 할 일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일상사에 대해 요즘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날마다 또는 늘 있는 일이 내겐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가령 돌 캐고 풀 뽑는 일도 나의 일상사 가운데 하나일 테다. 한 해의 일을 돌아보니 날이 밝으면 밭에 가서 돌을 골라냈고 풀을 뽑았고, 또 다음날에도 돌을 캐고 풀을 깎고 풀을 뽑았기 때문이다. 그 일을 내가 해야 할 일로 알고 반복적으로 했던 것이다. 마치 눈 오면 눈 치우고, 눈 그치면 잠깐 숨 돌리다, 다시 눈 오면 눈 치우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로 일상사를 삼다보면 몸은 고되지만 희한하게도 마음이 고요하고 깨끗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마음이 고요하고 깨끗한 그 상태에 있는 사람보다 더 부자인 사람은 없다는 생각도 들게 된다. 

가령 경허 스님의 ‘경허집’에도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이 강조되어 있다. “내 마음을 깨달은 후에 항상 그 마음을 잘 보전하여 깨끗이 하고 고요히 하여 세상에 물들지 말고 닦아 가면 한없는 좋은 일이 하도 많으니 부디 깊이 믿으면 죽을 적에라도 아프지 않고 앓지도 않고 마음대로 극락세계에도 가고 싶은 대로 가나니라.”라고 이르셨다. 
경허 스님은 마음을 평안히 하며 무심하게 가져서 남이 볼 적에 숙맥 같이 지내고, 또 귀먹은 사람 같이, 어린아이 같이 지내면 그로인해 마음에 망상이 없어진다고도 하셨는데, 돌 캐고 풀 뽑는 일을 일상사로 삼아서 하다보면 이와 비슷한 상태를 체험하기도 하는 것이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설악산 지게꾼이 생각난다. 그 분은 한창 때는 백이십 킬로그램이나 되는 짐을 지고 산장 같은 곳에 배달했다고 했다. 지금은 연세가 많아서 육십 킬로그램 정도를 진다고 했다. 평생을 설악산 지게꾼으로 살았다는데 한 가지 일만을 일상사로 삼아 살아온 그 분의 말씀이 의미심장했다. 

“높은 산은 골이 깊잖아요.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오는 게 더 힘들어요. 내 사업장은 큰 설악산입니다. 겨울을 나려고 나무들은 잎사귀를 다 내려요.” 

한 가지 일을 하면서 마음을 고요하고 깨끗하게 갖고 살았고, 그 덕택에 깨닫게 된 지혜의 말씀이었다. 그 분은 그렇게 어렵게 번 돈을 더 외롭고 힘든 처지에 있는 이웃들에게 오랜 세월 동안 희사를 했다고 했다. 나는 너무 감동되어 눈물을 훔치고 말았던 적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상사를 통해서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분명한 것이 아닐까 한다. 

“봄비 온다/ 공손한 말씨의 봄비 온다// 먼 산등성이에/ 상수리나무 잎새에// 송홧가루 날려 내리듯 봄비 온다// 네 마음에 맴도는 봄비 온다// 머윗잎에/ 마늘밭에/ 일하고 오는 소의 곧은 등 위에// 봄비 온다/ 어진 마음의 봄비 온다” 

이 시는 내가 쓴 졸시 ‘봄비’ 전문이다. 돌 캐고 풀 뽑다 문득 봄비 오면 나는 툇마루에 숙맥처럼 앉아 봄비 내리는 것만을 바라볼 것이고, 그러면 나도 말씨가 고와지고 마음이 어질게 될 것이다. 내 마음에 벌써 봄이 설렌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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