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경16관변상도,14세기 초 202×129cm, 일본 서복사 소장
권력의 허망함을 표현한 <관경16관변상도>
불교의 수행법 중에 ‘관불삼매(觀佛三昧)’가 있다. 부처님의 공덕과 상호를 생각하고, 관찰하며, 수행하는 참선법이다.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에는 삼매를 ‘하나의 대상에 마음이 집중되어 마음이 선해진 상태(善心一境性)’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수행자들은 오래전부터 불상이나 불화를 수행처에 모셔두고 깊이 바라보며 관불삼매의 방편으로 삼아왔다. 수행자는 삼매에 들기 위한 표상(表象, 추상적인 사물이나 개념에 상대하여 그것을 상기시키거나 연상시킬 수 있게 구체적인 사물로 나타내는 일)으로 불상을 선택한 것이다.
고려 시대 그려진 <관경16관변상도(觀經十六觀變相圖, 일본 서복사 소장)>는 이렇게 관불수행의 표상으로 그려진 불화이다. 이 불화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서기 1~2세기 초 성립)』의 영향에 의해 그려진 불화로 경의 정종분에는 아미타불과 서방극락세계를 볼 수 있는 16가지 관법에 관하여 설하고 있다. 이 경이 성립하게 된 배경으로 고대 인도 마가다 국의 왕실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을 들 수가 있는데, 경의 서분에 이 사건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 보면, 인도 마가다 국의 태자 아사세가 아버지인 빈비사라 왕의 왕위를 찬탈하고 감옥에 가두어 굶겨 죽이려 하는데 그의 어머니 위제희 왕비가 몰래 음식을 가져다주어 빔비사라 왕의 목숨을 연명시켰다. 이를 알게 된 아사세 태자는 자신의 어머니마저 시해하려 하였으나 신하의 간곡한 만류로 위제희 왕비를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감옥에 갇힌 왕비는 영축산에 계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미움도 괴로움도 없는 진실한 행복의 세계인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태어나길 간곡히 청원하였다. 이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위제희 왕비에게 아미타불의 서방극락정토를 볼 수가 있고, 그곳에 태어나는 방법인 16가지 관법을 알려주었다. 왕비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르쳐 준 16가지 대상을 깊이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마침내 세상 모든 것이 공空한 것이라는 이치를 터득하며 생사를 초월한 무생인(無生忍)의 경지에 이르러 깨달음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고려 불화 <관경16관변상도>는 1323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당시 원의 간섭을 받던 고려 왕실의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간에 일어난 왕권쟁탈 사건과 『관무량수경』 서분에 쓰인 마가다 국의 왕권쟁탈 사건과 연관해서 이 불화의 조성 배경을 추측하게 한다. <관경16관변상도>를 보면 해. 물. 땅. 나무. 등의 16가지의 대상을 그려서 극락을 깊게 관(觀)하게 하는 표상으로 삼고 있다. 예를 들면, 불화 상단 중앙에 있는 붉은색 원상은 해를 상징하며 일상관(日想觀)에 들게 하려고 표현한 것이다. 수상관(水想觀)도 마찬가지로 원상 안에 물을 그려 수상관의 표상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 불화에는 극락세계에 태어날 수 있는 16관의 대상이 묘사되어있다. 즉, 서복사에 소장된 <관경16관변상도>는 관불삼매의 표상이 되어 준 불화인 것이다.
관불수행은 미움도 괴로움도 없는 진실한 행복의 세계를 갈망하는 사람에게 이를 보는 마음의 눈을 가지게 하려는 것으로, 부처님은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깨달음을 포기하는 우리에게 관조의 눈으로 깨달음의 세계를 보게 하려고 관불 수행법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불화는 관불의 표상이며 관불수행의 방편이었다
박경귀 作, 사비성에 떠오른 만월,2021,문양 천 위에 분채, 80×80cm
나의 작품 속 만월, 나를 바로 보기 위한 표상
이번에는 관심(觀心)의 표상으로 그려진 나의 작품을 소개하려 한다. 작년 8월, 나는 만월을 소재로 ‘관심의 표상’이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를 통해 표상회화로서의 불화를 모색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나는 달을 무척 좋아한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달의 모습을 보면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각으로 바라보는 달은 작은 초승달에서 시작하여 커다란 보름달로 변해간다. 나는 달이 이러한 변모 과정을 거쳐 보름달에 이르는 것을 수행자가 정진(精進)하여 마침내 정각(正覺)을 이뤄내는 모습과 같다고 여겼다. 내가 만월(滿月)을 그리는 이유도 그것을 바라보면 수행자의 정진하는 모습이 중첩되며 나를 성찰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만월은 나를 바라보기 위한 표상(表象)이다.
만월은 원형이다. 각이 무한히 많아지면 원형이 된다. 즉, 원은 무한히 많은 각의 집합이다. 원은 무한히 많은 각의 집합이어서 조형적으로 가장 고차원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반대로 각이 없으므로 조형상 가장 단순한 형태라고도 할 수 있다.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라 할 수 있다. 원은 특히 중심축에서 테두리까지의 거리가 같아 이를 바라보면 안정감과 균형감을 느끼게 하여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에 들게 하는 시각적 속성이 있다. 이러한 원(圓)의 속성을 가진 만월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해진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적멸(寂滅)’ 혹은 ‘사마타(Samatha)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만월 속에는 불상의 머리 광배(光背)인 두광(頭光)의 문양을 그려 넣었다. 특히, 기원 5세기 전후 인도와 동방 각국의 불상에 표현된 두광 문양을 그려 넣었다. 이 시기 동방으로 뻗어 나간 빛의 여정을 사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품명을 ‘갠지스강 위의 만월’, ‘다퉁을 밝힌 만월’, ‘사비성에 뜬 만월’ 등, 불상이 조성된 곳의 지명이나 도시명을 붙인 이유도 빛이 머문 도시와 삶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불교미술은 인도를 비롯한 동방 곳곳에서 개성 있는 빛깔로 피어나고 있었다. 인도는 굽타 시대로 사르나트나 마투라 지역의 불교조각과 아잔타 석굴의 벽화 등, 인도적 불교미술이 만개하였고 한편으로 인도의 붓다고사(Buddhaghosa) 스님이 『청정도론』을 집필하여 삼장(三藏)이 정립되고 삼매 수행이 활발히 일어났다. 동방에서는 다퉁, 평양, 사비, 서라벌, 아스카 등에서 도시의 염원이 담긴 불교미술이 새롭게 꽃피고 있었다.
만월에 두광 문양을 그린 또 다른 이유는, 수행자가 불상을 바라보며 부처님의 상호와 공덕을 생각하고 삼매에 빠지듯, 만월 속에 새겨진 부처님의 빛 문양을 바라보며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생각하고 자신을 바라보게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두광은 부처님의 머리에서 발산하는 빛으로 깨달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아우라(Aura)’ 이자 세상을 밝히는 ‘광명(光明)’으로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핸드폰을 기반으로 24시간 실시간으로 새로운 정보를 마주하며 살고 있다. 쏟아지는 새로운 정보를 쉴 새 없이 접하면서 자신을 챙기고 성찰하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적어지고 있다. 동시대인의 이러한 삶을 보며, 그들이 ‘관심(觀心)’에 들길 바라는 마음도 만월 작업을 시작한 동기 가운데 하나이다.
나에게 ‘관심(觀心)’은 고요와 평온 가운데서 ‘마음 챙김 (Mindfulness)’이며 이러한 가운데 세상과 자기를 관조(觀照)하며 자기 마음의 본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만월은 나를 고요와 평온으로 이끄는 표상이다.
“관심(觀心)은 고요와 평온에서 자기 마음 챙김이며 나의 만월(滿月)은 나의 마음을 고요와 평온으로 초대하는 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