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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이미령의 본생경 이야기

내 머리 위의 하얀 천사

  • 입력 2022.04.07

아주 오랜 옛날, 비데하 왕국의 미틸라 도시에 마카데바라는 왕이 살고 있었습니다. 왕은 세상을 정의와 진리로 다스리는, 아주 정의로운 왕이었지요. 어질고 현명한 마카데바 왕이 어느 날 매일 아침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는 이발사에게 명했습니다.

“앞으로 내 머리에서 흰 머리카락을 한 오라기라도 발견하면 그 즉시 내게 알려라.”

이발사는 그 후 왕의 머리카락을 세밀히 살피면서 머리를 매만졌지요. 그러던 어느 날, 칠흑같이 새카만 왕의 머리카락에서 흰 머리카락 한 올을 발견하고서 황금 족집게로 흰 머리카락을 뽑아서 왕의 손 위에 올렸습니다. 

그때 왕에게는 아직도 헤아릴 수 없는 수명이 남아 있었는데, 자기 머리에서 뽑은 흰 머리카락을 보자 오싹해졌습니다. 마치 죽음의 왕이 바로 곁에 서 있는 것 같았고, 불타오르는 오두막에 들어간 것만 같아서 그는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오! 참으로 어리석구나, 마카데바여, 흰 머리카락이 생기도록 무얼 하고 있었는가. 아직까지 번뇌를 버리지 못했구나.”

세월이 속절없이 지나가버리고 있는데 그동안 무엇을 하며 지내왔는지를 떠올리자니 그만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습니다. 옷이 땀에 푹 젖도록 탄식하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왕은 마침내 뜻을 굳혔지요.

“지금이야말로 세속을 떠나서 출가해야 할 때다.”

왕은 흰 머리카락 한 올을 발견하고 보고한 이발사에게 풍요로운 마을을 하사하며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맏아들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이걸 보아라. 내게 흰 머리카락이 나타났다. 나는 늙었다. 나는 인간으로서 누릴 만한 쾌락은 다 누렸다. 이제 천상의 즐거움을 구하려 한다. 세속에 머물러서는 천상의 즐거움을 구할 수가 없다. 세속을 떠나기에 아주 좋은 때가 왔으니 그대는 왕위를 물려받아라. 나는 출가해서 마카데바 망고 숲 동산에 머물면서 수행자로 살면서 남은 생을 보낼 생각이다.”

천상은 한없이 즐거운 곳입니다. 천상의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다음 생에 천상에 태어나서 즐겁게 살겠다는 말이지요. 어떻게 하면 천상에 태어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남은 생애 동안 할 수 있는 한 보시를 실천하고, 자신을 윤리적으로 깨끗하게 다스리면서 세상을 향해 자비희사 네 가지 마음을 품으면 됩니다. 이렇게 살면 다음 생에 하늘의 신들이 누리는 즐거운 삶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천상의 즐거움 같은 건 안중에 없던 신하들은 왕의 느닷없는 선언에 놀라서 말렸지만 왕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내게서 젊음을 빼앗아간 이런 머리카락이 생겨났다.죽음의 신의 심부름꾼이 나타났다.내가 출가할 때가 온 것이다.

 

왕은 그날로 왕위를 버리고 궁을 나왔습니다. 왕궁에서 누렸던 온갖 즐거움과 권력과 명예를 다 접어놓고 망고 숲에 들어갔습니다. 수행자가 되어 숲속에 머물면서 왕은 네 가지 명상에 온힘을 쏟았습니다.

그 첫 번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을 향해 따뜻한 마음, 우정 어린 마음을 보내는 자애심(慈)을 키우는 명상입니다. 두 번째는,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을 향해 가엾이 여기는 마음, 연민하는 마음, 공감하는 마음(悲)을 키우는 명상입니다. 세 번째는,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행복하고 기쁨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喜)을 키우는 명상입니다. 네 번째는, 세상의 존재들을 향해 우정 어린 마음과 가엾게 여기는 마음과 기쁨으로 충만한 마음을 쏟아 부으면서도 스스로는 담담하게 평정심을 유지하는(捨) 명상입니다.

이 네 가지 명상을 하면서 그는 숲에서의 삶을 만끽했습니다. 세속에서 그토록 열심히 추구하던 권력과 명예와 쾌락은 이제 더 이상 그를 유혹하지 않습니다. 미련은 전혀 남지 않았습니다. 칠흑같이 검던 머리에 하얀 머리카락이 돋아나기 시작한 마당에 언제까지 세속의 즐거움을 쫓아다니느라 인생을 낭비하겠습니까?

이전에 왕이었던 마카데바는 점점 더 깊이 선정의 경지로 들었고, 마침내 자신이 도달한 경지에서 흔들리지도 물러서지도 않게 됐습니다. 그렇게 숲속의 성자로서 남은 생을 명상과 사색으로 보낸 마카데바는 목숨이 다해 천상의 세계에 태어났습니다. 그곳에서 충분히 살고서 천상에서 죽은 뒤에 다시 이전에 왕으로 지냈던 도시에 와서 태어났지요. 그는 다시 한 번 왕위에 올라서 그 사이 쇠퇴해져가고 있던 나라를 강성하게 다스린 뒤 역시 망고 숲 동산으로 출가하여 네 가지 명상을 힘껏 닦으며 남은 생을 보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것인데, 그 동기가 흥미롭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 제자들인 스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아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참으로 생각할수록 묘합니다. 우리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떻게 왕자의 신분을 훌훌 벗어버리고 출가하실 수 있었을까요? 세속의 권력과 명예와 부와 쾌락에 조금도 미련을 두지 않고 용감하게 세속을 벗어난 그 용기가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제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며 부처님을 찬탄하자 그곳으로 세존께서 오셔서 말씀하시지요.

“여래가 세속을 과감히 떠난 것은 이번 생의 일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전생에도 그리 하였으니 이제부터 전생의 일을 들려주겠다.”

그리하여 마카데바 왕의 출가수행 이야기가 나온 것이고, 부처님은 이렇게 이야기 끝을 맺었습니다.

“지난 세상에 왕의 흰 머리카락을 찾아서 알려준 이발사는 지금의 아난다이고, 왕위를 물려받은 왕자는 지금의 라훌라요, 흰 머리카락 한 올을 발견하고서 출가한 마카데바 왕은 바로 지금의 나다.” 

(본생경 9번째 이야기)

나이 들면 흰 머리카락 나는 건 당연한 일인데 겨우 한 올 가지고 너무 수선을 피우는 것 같습니다. 염색하면 다 가려질 것이고, 백발 그대로 유지하면 또 그 나름대로 권위도 설 텐데 말입니다. 요즘은 흰 머리카락 때문에 고민하는 2, 30대도 많고, 수많은 중장년층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머리를 새카맣게 염색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마카데바 왕의 저 행위는 좀 지나치다 싶습니다.

어찌됐거나 흰 머리카락은 반갑지 않은 손님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밀려날 때가 되었다는 암시인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피하고 싶고, 할 수 있으면 늦게 만나고 싶었던 바로 그 노화를 나도 어쩔 수 없이 머리에 이고 살게 됐음을 인정해야 하니 즐겁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흰 머리카락은 나를 찾아온 두 번째 천사라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초기경전인 <맛지마 니까야>에는 염라대왕이 저승에 온 자를 심문할 때 이렇게 묻는다고 합니다.

“그대는 사는 동안 두 번째 천사가 나타난 것을 보지 못했는가?”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대는 여자나 남자가 팔구십이나 백세가 되어 늙어 허리가 구부러지고,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거나 덜덜 떨며 걷고 병들고 이가 빠지고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주름지고 검버섯이 피어나는 것을 본 적이 없단 말인가?”

“그건 보았습니다.”

염라대왕은 말합니다.

“남들이 늙는 건 당연하다고 여겼겠지? 그대가 바로 그런 모습이 되리라는 건 상상조차도 못했지? 생각 좀 하고 사는 그대가 어찌 자신도 늙음을 피할 수 없고 늙음을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건 깨닫지 못하였는가? 그러니 게을러서 선행을 하지도 않은 것 아닌가? 그대가 게을러서 선행을 하지 않고 악행을 한 것이 누구 탓이겠는가? 오로지 그대 자신이 행한 것이니 그 과보 역시 그대의 몫이다.”

그리고는 곧 그가 저지른 악행에 따른 과보가 차례로 내려지게 된다는 것이지요.(참고로, 태어남은 첫 번째 천사요, 병듦이 세 번째 천사요, 죽음이 네 번째 천사라는 것은 눈치 채셨을 것입니다.)

염라대왕의 심문내용을 보면, 늙음이 서글프기만 한 현상은 아닙니다. 나를 심기일전해서 과거의 내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새롭게 각오를 하고 살아갈 절호의 찬스를 알려주는 메신저(천사)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내 머리에 생겨난 흰 머리카락은 그런 때가 왔음을 알려주는 천사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동안 미뤄왔던 천상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수행을 하려고 그 즉시 실행에 옮긴 마카데바 왕은 그 천사를 제대로 알아본 것입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아난다와 함께 탁발하러 나섰다가 늙은 부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부부는 본래 도시에서 아주 큰 부잣집의 자손이었지요. 그런데 그 부모가 수많은 재산을 물려주면서 아무 기술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순식간에 모든 재산을 다 날리고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기술도 지식도 없는데다 아끼고 모으는 법도 익히지 못했으니 극빈자 신세가 되어 음식을 얻어먹으며 신산한 노후를 살아가고 있는 중이었지요. 부처님은 말했습니다.

“저 두 사람은 인생의 세 때를 다 놓치고 말았다. 젊어서 열심히 일하거나 수행했더라면 큰 부자나 성자가 되었을 텐데 그 시기를 놓쳤다. 중년에 접어들어서라도 열심히 일하거나 수행했더라면 인생이 저토록 황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노년에 접어들어서 수행이라도 열심히 했다면 인생이 허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의 세 때를 다 허망하게 흘려버리고 지금 저렇게 쪼그리고 앉아 있는 노부부를 보아라. 마치 물고기가 살지 않는 마른 연못을 지키는 늙은 왜가리와 같지 않느냐. 땅에 떨어진 화살처럼 지나간 날을 떠올리며 하릴없이 눈물만 지을 뿐이구나.”

“인생은 첫날 출발한 그대로 계속해서 달릴 것이며, 어디서도 방향을 틀거나 머물지 않는다오.”라고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말했습니다. 어차피 숨이 멎을 때까지 달리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흰 머리카락 한 올의 출현은 그런 내게 어떻게 마지막까지 잘 달릴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고마운 천사입니다. 

그렇다면 마카데바 왕처럼 모든 것 다 내버리고 출가하는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노래 가사를 바꿔 부르기라도 해야겠습니다.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수행하기 딱 좋은 나인데.”라고 말이지요. 

 

 

이미령 (경전 이야기꾼, 불교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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