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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밭을 경작하는 봄
동계올림픽에 대한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하루 30만 명을 훌쩍 넘는 오미크론 폭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동해안 산불 등 우울한 소식들이 봄소식보다 빨리 찾아왔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남촌의 꽃소식이 들려온다.
파릇한 새싹으로 돋아나는 씨앗
겨우내 잊고 지냈던 화단에도 다시 눈길이 머물기 시작했다. 얼어붙었던 땅껍질을 뚫고 수선화의 싹이 돋아나고, 메말랐던 가지 끝에도 새순이 눈을 틔우기 시작했다. 톡톡 소리라도 날 것처럼 곳곳에서 생명의 에너지가 용솟음친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왜 봄을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다. ‘약동(躍動)’은 ‘튀어 오른다’라는 뜻인데 영어에서도 봄을 ‘spring’이라고 표현한다. 봄이 되면 생명의 에너지가 샘솟듯 솟아오르고, 새싹들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기에 이 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듯하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관계적 맥락에서 생성되고 움직인다는 것이 불교의 핵심 교리인 연기설(緣起說)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새싹은 제 스스로 잘나서가 아니라 따사로운 봄 햇살이 쏟아지고, 촉촉한 봄비가 흩뿌리는 시절인연을 만났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이처럼 복잡한 관계의 산물이기에 부처님은 모든 유위법은 무아(無我)라고 하셨다. 무수한 관계 속에서 생성하고 변화하므로 개체적 존재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 단지 봄이 왔기 때문에 싹이 돋아난 것일까? 그런 거라면 씨앗은 아무런 역할도 못한 것이고, 생명의 약동이라는 축제에서 별반 역할도 없는 것이다. 연기설에 입각해 본다면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계절의 변화라는 우주적 관계의 산물이다. 하지만 새싹이 돋아나기 위해서는 씨앗이라는 직접적인 인(因)과 조건이라는 보조적인 연(緣)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야 한다. 따라서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환경의 변화뿐만 아니라 씨앗 자체의 특성과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만약 화단에 파종된 씨앗이 쭉정이라면 아무리 햇살이 따사롭고, 봄비가 촉촉하게 내려도 새싹은 돋아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씨앗이 튼실하다면 비록 주변 조건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부실하게나마 싹을 틔워낼 수 있다. 이런 이치를 ‘친인소연(親因疏緣)’이라고 한다. 하나의 일이 생성되는데 있어 조건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씨앗 자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봄이 왔다고 해서 모든 씨앗이 싹을 틔우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새싹들이 파릇하게 돋아나는 것은 씨앗 속에 한 그루의 꽃으로 자라날 수 있는 자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을 갖춘 씨앗만이 계절의 변화라는 조건을 만났을 때 싹을 틔우고 건강한 생명으로 자라날 수 있다.
내 속에 있는 깨달음의 씨앗
자연의 이치가 이렇다면 우리들도 그런 씨앗을 품고 있을까? 우리들에게도 파릇한 새싹을 틔워낼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을까? 만약 그런 자질을 갖추고 있다면 우리들도 시절인연이 무르익으면 새싹을 틔워낼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이 쭉정이라면 설사 봄이 찾아와도 우리들은 새싹을 피울 수 없을 것이다.
불교의 핵심교리는 연기법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관계적 맥락으로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 스스로가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것 또한 핵심교리에 속한다. ‘나의 본성(自性)’을 잘 가꾸어 불성의 싹을 틔우고, 보살행의 꽃을 피우고, 마침내 깨달음의 열매를 수확하는 것이 불자의 신행이다. 보리(Bodhi)의 열매로 영글게 될 그 씨앗을 ‘불성(佛性)’이라고 하는데 모든 중생들의 마음속에는 불성의 씨앗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달마대사는 중생의 마음속에는 금강(金剛)과 같이 무너지지 않는 불성이 있다고 했다.
『육조단경』에 따르면 “만약 우리의 마음속에 스스로 참 됨이 있다면, 그 참됨이 곧 부처를 이루는 씨앗이다(有眞卽是成佛因).”이라고 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부처될 씨앗[成佛因]’이 되는 ‘참됨[眞]’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자기 성품에서 삼신(三身)을 보면 그것이 곧 부처가 되는 깨달음의 씨앗이다(成佛菩提因).”라고 했다. 봄이 오면 새싹을 틔우는 씨앗들처럼 우리들에게도 깨달음의 열매로 영글게 될 씨앗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단경』에서는 ‘부처될 씨앗[成佛因]’ 또는 ‘깨달음의 씨앗(菩提因)’이라고 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일체 모든 중생들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깨달음의 씨앗을 품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중생으로 살아가는 것은 마치 얼어붙은 대지에 파종된 씨앗처럼 무명(無明)에 덮여 있기 때문이다. 얼어붙은 땅껍질을 뚫어야 비로소 씨앗이 돋아날 수 있듯이 우리들도 무명이라는 번뇌를 뚫어야만 불성이 싹을 틔울 수 있다. 얼어붙은 땅을 뚫고 새싹이 돋아나게 하는 것이 봄볕이듯 무명을 뚫고 불성을 싹틔우는 것은 지혜의 태양이다.
이렇게 보면 마음을 가꾸는 것은 자연의 이치와 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마조스님은 “그대가 심지법문(心地法門)을 배움은 씨앗을 뿌리는 것(下種子)과 같고, 내가 법요(法要)를 설함은 하늘이 비를 내려 적셔주는 것(彼天澤)과도 같다.”고 비유했다. 마음 밭을 가꾸는 것은 씨앗을 파종하는 것과 같고, 바른 법을 만나는 것은 봄비와 같다는 것이다.
분명 모든 중생들에게 불성의 종자가 파종되어 있지만 무명으로 덮여 있으면 싹을 틔우지 못한다. 봄비를 맞아야 씨앗에 싹이 돋아나는 것처럼 내 속에 함장 된 불성도 바른 가르침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선지식을 만나 지도를 받고, 경전을 통해 부처님의 지혜를 배우고, 정법(正法)이라는 밝은 햇살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온갖 씨앗이 파종된 마음 밭
이처럼 역대 조사들은 내 속에 새싹으로 돋아날 생명력이 있고, 번뇌의 껍질을 뚫고 나올 무한한 자질과 힘이 있다고 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무명의 겨울을 이겨낼 찬란한 법연(法緣)을 만나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마음속에는 깨달음의 씨앗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황량해 보이는 겨울 대지를 보면 생명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봄이 오면 그곳에서 온갖 싹들이 돋아나고, 마침내 백화난만한 생명의 정원으로 변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드넓은 대지에는 수선화 씨앗도 있고, 백합 씨앗도 있고, 온갖 잡초 씨앗도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이라는 대지에도 좋은 씨앗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불성의 씨앗도 있지만 번뇌로 자라나는 나쁜 씨앗들도 함께 있다. 법상유식에서는 이런 마음의 특징에 대해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이라고 했다. 우리의 마음 밭에는 참됨과 거짓이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육조스님도 중생의 마음에 대해 ‘심지함제종(心地含諸種)’이라고 했다. ‘마음의 땅에는 온갖 씨앗들이 파종되어 있다’는 것이다. 훈훈한 봄바람이 불고, 촉촉한 봄비를 맞으면 그 모든 씨앗들이 앞 다투어 싹을 틔운다(普雨悉皆萌). 악한 인연을 만나면 악한 씨앗이 싹을 틔울 것이고, 선한 인연을 만나면 선한 씨앗이 싹을 틔울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조스님은 이와 같이 온갖 씨앗이 파종되어 있는 마음을 대지(大地)에 비유하고, 그 속에 함장된 씨앗을 싹트게 하는 것을 법문(法門)이라고 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내재된 불성도 법연을 만나야 싹을 틔운다는 것이다. 그렇게 중생의 마음속에 내재된 불성을 싹틔우는 것을 마조스님은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고 했다. 마음의 땅을 가꾸는 법문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지적한 바와 같이 마음 밭에는 ‘온갖 씨앗[諸種]’이 파종되어 있기에 좋은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도록 밭을 제대로 갈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른 법을 듣고, 정법을 공부하면 그것이 자양분이 되어 불성의 싹을 틔울 것이다. 우리가 절에 와서 법문을 듣고, 경전을 공부하는 것은 모두 좋은 씨앗을 싹틔우기 위해 마음 밭을 경작하는 일이다. 반대로 악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고, 나쁜 내용을 만난다면 마음도 그런 것에 물들게 되고 나쁜 싹을 틔우기 마련이다.
부처님은 출가 수행자를 일러 ‘마음의 밭을 경작[心耕]’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새봄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 밭을 얼마나 잘 가꾸고 경작하는가에 달려 있다. 백화가 난만한 봄 날, 마음 밭에 불성이 싹을 틔우고, 갖가지 만행의 꽃이 피어나도록 할 때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우리도 마음의 밭을 가꾸어야 하는 계절이다. 풍성한 깨달음의 열매를 수확하고자 한다면 부지런히 마음 밭을 경작해야 한다. 진리의 말씀인 불광(佛光)은 햇살이 되고, 자비의 실천은 대지를 적시는 단비가 된다. 법요의 햇살과 자비의 빗물이 마음의 땅을 적시면 백화난만한 들판처럼 우리의 삶에도 지혜의 생명이 충만하게 될 것이다.
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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