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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특집_조계사 목조여래좌상

특집_조계사 목조여래좌상

  • 입력 2022.04.08

2022년 새해 조계사 대웅전의 목조여래좌상이 보물로 지정 예고되었다. 늘씬하고 가는 신체, 안정된 비례, 높은 육계와 섬려한 얼굴, 부드럽고 유려한 옷주름, 탄력적인 양감, 생동감있는 세부 표현 등의 우수성이 높이 평가받았다. 이 목조여래좌상은 조선초기 왕실에서 발원하여 영암 도갑사 대웅전에 봉안되었던 불상으로 1938년 조선불교 총본산 건립에 맞춰 현재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이안되었다. 스님들의 말씀에 따르면 당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사에 어울리는 불상을 모시기 위해 전국의 불상을 검토하였으며 상호가 원만하고 당당하며 한국 불상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불상으로 도갑사 대웅전 불상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조계사로 모셔진 이후 도갑사 대웅전과 내부에 봉안된 불상들은 1977년 화재로 모두 전소되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이 목조여래좌상은 이제 한국을 대표하고 조선불교의 자주성과 정통성을 품은 상징적 불상이 되었다. 

 

 

보물 지정 경위와 역사성

조계사 대웅전 목조여래좌상은 1938년 본존불로 봉안된 이후 2000년 7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당시 목불좌상(석가불)이라는 명칭과 함께 조선전기의 양식을 가지고 있으나 통일신라, 조선후기 등의 양식이 혼재되어 있어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2020년 11월 27일 조계종 총무원 행정관 유대호는 <조선전기 도갑사 불상군의 특징과 제작배경>이라는 제목의 학회 발표에서 조계사 대웅전 목조여래좌상의 양식적 분석을 통해 조선왕실에서 15세기에 발원한 도갑사 불상 중 한 구일 것이라는 내용을 주장하였다. 이 내용은 당시 학계와 언론의 큰 주목을 받으면서 조사에 대한 필요성과 문화재 승격에 대한 열망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조계사에서는 2021년 1월 불상에 대한 정확한 조사에 착수하여 이운 경위와 연혁을 정확하게 밝히고 보물 지정을 위한 보고서를 2021년 3월 서울시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문화재청에 보물 승격신청서를 제출하였다. 문화재청에서는 이 불상의 중요성과 경과를 파악하여 매우 빠르게 심의를 진행하였으며 그 결과 1년도 안된 2022년 2월 28일 보물로 지정 예고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거의 1년여 만에 모두 이루어졌으니 화재까지 피한 대웅전 목조여래좌상의 강한 원력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목조여래좌상은 조계종 총본산법당의 건립과 역사를 함께 한다. 즉, 총본산 법당(조계사 대웅전)은 1937년 10월 12일 상량식을 거행하였으며, 이후 1938년 6월 2일에는 편액을 설치하고 3일 후인 6월 5일 도갑사에서 이안한 불상을 전각에 봉안하였다. 불상 봉안과 함께 금용 일섭이 새로 조성한 후불탱을 8월 29일에 봉안하였으며, 마침내 10월 25일 낙성식과 봉불식을 거행함으로서 불사를 완료하였다. 당시의 불사에 대해서는 후불탱의 화기 및 『佛敎』新第17輯(경성불교사, 1938)을 비롯하여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언론에서도 자세하게 보도한 바 있다. 당시의 사진을 참고해보면 이 목조여래좌상은 불단 위에 별도의 대좌를 만들어 단독으로 봉안하였다. 그리고 불상의 좌우에는 용조각을 배치하고, 불단은 나전으로 꾸미는 등 화려한 장식성이 돋보인다. 그 후 2006년 현재의 주존인 삼존불좌상을 새로 봉안함에 따라 그 옆에 별도의 예배 공간을 마련하여 감실안에 불상을 모셨다. 
도갑사는 세조(재위 1455-1468)와 그 동생 영응대군(永膺大君, 1424-1467년) 등 왕실의 후원 아래 15세기 중창불사가 크게 이루어진 사찰이다. 이 불사는 신미(信眉)와 수미(守眉)의 주도하에 1457년부터 1495년 까지 약 38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유리건판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도갑사 대웅전의 불상들 역시 이 때 만들어졌다. 따라서 세조를 비롯한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만들어진 거의 마지막이자 최고의 불상이라는 상징성을 가진다. 


특징과 복장물 

목조여래좌상은 높이 100cm, 무릎폭 78.2cm로 곧은 자세에 앞으로 숙인 머리, 가늘고 긴 신체에 낮은 무릎 그리고 작은 얼굴에 비해 넓은 어깨, 양감있는 가슴 처리 등 전체적으로 당당하고 위엄있는 모습이다. 작고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은 신체에 비해 작은 편이며, 둥글고 높게 솟은 육계에 끝이 뾰족한 나발, 정상계주의 표현에서 티벳과 중국 불상의 영향이 보인다. 위로 살짝 올린 눈매에 콧볼이 좁고 콧대가 높아 날렵한 인상을 주며, 도톰하고 작은 입술은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려 약간의 미소를 표현하였다.  
수인은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항마촉지를 하였으며 왼손은 배 앞에서 손바닥을 위로 하고 중지를 살짝 구부렸다. 유연하게 구부린 손가락과 살집이 있는 두툼한 손등, 손금까지 새긴 손바닥 등 정밀하고 사실적인 표현이 인상적이다. 이 불상의 존명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에서 석가불일 가능성도 있으나 살짝 구부린 손가락에서 아미타불일 가능성도 있어, 석가와 아미타불의 통섭적 의미를 보인다. 
이 목조여래좌상의 왼쪽 어깨에 접혀진 삼각형의 옷주름이나 왼쪽 어깨에 자연스럽게 접혀진 삼각 옷자락 그리고 무릎과 종아리의 굴곡을 따라 형성된 사실적인 옷주름 등은 조선초기에 유행했던 특징들이다. 특히,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458년), 천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482년)등 15세기 불상과 유사하며, 이는 불상의 목재 연륜연대인 1465±10(2007년 조사)와도 거의 비슷하다.  
목조여래좌상의 재료는 피나무 속, 잣나무류, 느티나무 등 총 3가지로 분석되었으며 몸체는 거의 느티나무로 판별되었다. 느티나무는 단단하고 질긴 성질을 가진 불상 재질로는 보고된 바가 거의 없는 귀한 재료이다. 불상의 내부는 못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내부는 삼베와 옻칠로 마감된 상태로서 이는 목부재를 잡아주어 갈라짐이나 비틀림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고 내구성을 높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부에 삼베로 겹붙이기를 한 가장 중요한 배경은 불상에 쏟은 신앙과 정성 그리고 신분이 높은 발원자 계층 및 복장물 안립과 연관된다.
그러나 15세기 제작 당시의 복장물은 없어진 상태이며, 근대 이후 몇 차례에 걸친 개금 및 재복장이 이루어지면서 다시 넣은 물목이 공개된 바 있다. 즉, 1938년 도갑사에서 이운하면서 새로 납입한 목제사리호와 사리2과, 보석류 등이 2006년 개금 불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목제사리호에는 밑면과 몸체 3면에 붉은색으로 ‘일봉안 불기 이구육오년 칠월(日奉安 佛紀 二九六五年 七月)’이라 새겨져 있어 불기2965년인 1938년 조성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몸체에는 ‘禪敎兩宗朝鮮佛敎 三十一本山 住持代表 李鍾郁’, ‘禪敎兩宗朝鮮佛敎 三十一本山 總本山 建設委員 林錫珍’, ‘舍利獻納者 禪敎兩宗大本山 大興寺 住持 朴暎凞’ 라고 쓰여 있다. 즉, 선교양종 조선불교 31본산 주지대표 이종욱, 총본산 건설위원 임석진이 주최가 되었으며 사리 헌납은 대흥사 주지인 박영희스님이었다. 이 복장물은 『경향신문』의 1970년 4월 기사에 따르면 1967년 도난당하였다가 1년 후인 1968년 3월 찾은 다음 다시 재봉안하였다고 한다.  

가치와 상징성

조계사 대웅전의 목조여래좌상은 매우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에 신비로운 매력을 갖춘 조선시대 15세기의 아름다운 불상이다. 조형적인 우수성은 세조를 비롯한 왕실이라는 발원자의 높은 신분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내부까지 삼배와 옻칠로 마감한 완전성 역시 이에 근거한 특징이다. 1977년 화재로 인해 도갑사 불상군이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 것을 고려하면, 조계사 상은 15세기 중후반 왕실 발원 불사의 수준과 품격을 보여주는 현존 유일한 도갑사 대웅전의 존상으로 그 가치가 더욱 높다. 
일제 강점기 총본산 건설 사업이 가지는 불교계의 상징적 측면 역시 고려된다. 총본산 건설 사업은 당시 불교계의 통합 기관 건립을 위한 최우선과제였으며 31본산 주지가 주도하고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투여된 대규모 공사였다. 그 중심은 일본식이 아닌 민족운동의 상징인 정읍에 있었던 보천교 십일전이라는 전통적인 목조건축을 옮겨 짓고 가장 아름다운 조선시대 최고의 불상을 봉안하는 것이었다. 이로서, 조계사 대웅전 목조여래좌상은 우리나라 불교의 정통성과 독자성이라는 상징과 불교도의 염원이 담긴 특별한 존재로 신앙되어 현재에 이른다. 




 

정은우 (부산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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