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무 시인이 쓴 시 가운데 ‘달의 잎사귀’라는 시가 있다. 시는 짧다. “산책길, 잠을 벗어 놓은 토끼가 풀잎에 얼비친 낮달의 잎사귀 아삭아삭, 맛있게 뜯어 먹고 있었다.”라고 시인은 썼다. 단순하게 읽으면 토끼가 풀잎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라는 맥락이다. 그런데 가만히 잘 들여다보면 그 잎사귀에는 낮달이 얼비쳐 있고, 그래서 시인은 그 잎사귀를 낮달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토끼가 아삭아삭 비스킷처럼 먹고 있는 것은 낮달인 것이 된다.
이 시를 읽으면서 문득 나는 내가 요즘 너무 협소하게 생각하고, 상상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반문했다. 너무 빡빡하게, 여유가 없이, 재촉만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묻게 되었다. 삶의 시간을 살되 좀 넉넉한 단위로 여유도 좀 갖고, 더러는 느슨하게, 우주와 같은 큰 공간도 떠올리면서 살아야 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사실은 얼마 전 내가 내게 놀란 일이 있었다. 오래 신고 다닌 구두의 앞부분에 틈이 벌어져, 곧 밑창이 드러날 것 같아서 구두를 수선하는 곳에 들렀다. 나는 순간접착제 같은 것으로 붙이면 금방 고치는 일이 끝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것도 구두 수선하는 그 분이 첫말을 내기도 전에 말이다. 그런데 그 분의 말씀이 나를 당혹게 했다. “너무 오래 신으셨네요. 낡아서 그래요. 순간접착제로 붙이면 금방 또 터져요. 꿰매는 수밖에 없어요.” 나는 그 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물었다. “그래도 순간접착제로 붙여주시면 안될까요?” 그 분은 한참 뜸을 들이다 내게 말했다. “하루 맡겨놓으세요.” 구두를 갖고 와서 구두 수선소에 두고 갔다 하루의 시간이 지나면 와서 찾아가라는 말씀인데, 나는 그 하루라는 시간이 너무나 아득하게 느껴졌다. 마치 섬과 육지처럼 먼 거리로 느껴졌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삶을 살아가는 시간의 기준이 너무 짧아진 것은 아닐까 돌아보게 되었다.
물론 나를 당혹하게 한 일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택배를 보낼 일이 있어서 몇 주 전 금요일에 우체국에 전화를 드렸더니 우체부 아저씨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당장은 안 되고요. 다음 주 월요일 오후에나 들를게요.” 나는 다시 다급하게 여쭸다. “월요일 오후 몇 시에 오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 우체부 아저씨가 다시 내게 말했다. “시골이라 다니다 보면 몇 시가 될지는 콕 집어서는 말을 못해요. 오후에는 갈 수 있을 거예요.” 오후에 오겠다는 이 말이 왜 나를 당황하게 했을 지를 한참 후에 생각해보았다. 택배를 보낼 그 물건에 내가 오후 내내 꼼짝없이 묶여 있게 될 거라고 지나치게 초조해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내가 나고 자라면서 겪은 시간의 단위는 대개 ‘그러한 때’였다. 시골 어른들이 사용하는 ‘때’라는 그 시간은 날이 밝을 때, 해가 중천에 떴을 때, 해 지기 전에, 잠이 들기 전과 같은 ‘그러한 때’였다. 심지어 “장날에 장에 갔다 와서”라든지 “내일이나 모레에”라든지 심지어 “이 다음에”와 같은 시간을 약속하시곤 했다. 그러나 그 말로 인해 누구도 마음에 속박이 생기지는 않았다. 자신의 일을 그때그때에 다만 그냥 할 뿐이었다.
구두를 하루 맡겨두라는 말에 크게 놀라거나 오후에 오겠다는 말에 크게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부턴가 째깍째깍 초침처럼 삶을 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령 아침 식전에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어떤가. 나무 그늘에서 잠시 땀을 식히고 있을 때에 어떤 소식이 오면 어떤가. 저녁을 먹고 있을 때에 누군가 찾아오면 또 어떤가. 그 일을 미리 염려해서 애가 타고 또 마음이 조마조마할 이유가 실은 없는 것이었다. 지나고 보니 구두 수선하는 분의 말씀이나 우체부 아저씨의 말씀이 나를 곤란하게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나 스스로를 사정이 몹시 딱하고 어렵게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법구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마음은 대지와 같아서 칭찬과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성문의 기둥처럼 견고하며 티 없이 맑은 호수처럼 고요하다. 이런 사람에게 더 이상 윤회는 없다.” 이 말씀처럼 마음을 쓰되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그리고 고요한 상태를 잘 지킬 일인 것이다. 시간의 파도에 휘둘리지 않고서 마음을 크게 사용하면서 말이다. 느긋하게, 차분하게, 또 대범하고, 너그럽게 갖고서 말이다.
“어린 고양이가 처음으로 담을 넘보듯이/ 지난해에 심은 구근(球根)에서 연한 싹이 부드러운 흙을 뚫고 올라오네// 장문(長文)의 밤/ 한 페이지에 켜둔/ 작은 촛불”
이 시는 나의 졸시 ‘새봄’이다. 겨울의 시간을 밤의 공간에, 그리고 봄의 생명력을 꺼지지 않은 채 빛을 발하는 촛불에 견주어서 노래했다.
이제 봄이 시작이 되어 대지는 일을 시작했다. 일군 땅에서는 생명이 움트고, 구근에서는 순이 올라오고, 대지의 얼굴은 싱그러운 푸른빛을 머금고 있다. 대지는 생명들을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 하고, 꽃을 맺게 하는 큰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도 이 봄을 맞아 밝고 따뜻한 빛을 내면에 들여놓고, 푸근하고 자애로운 대지처럼 마음의 활동을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