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브라흐마닷타 왕이 바라나시를 다스리고 있을 때 일입니다. 보리살타는 어마어마하게 부자인 어느 바라문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부자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까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고 맘껏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지요, 그런데 보리살타는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은 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라던 것을 가지면 충족감은 아주 짧은 시간만 맛볼 수 있었고, 하나를 가지면 두 개를 가지고 싶고, 세 개, 네 개, 그러면서 더 큰 것, 더 좋은 것, 더, 더, 더, 더… 바라는 마음이 멈추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삶이지요. 보리살타 집안은 워낙 큰 부잣집이니까 원하는 걸 다 얻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바라던 마음도 끝없이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바라던 바깥 대상은 그대로인데, 바라는 내 마음은 시시때때로 달라집니다. 분명 어제 먹었던 똑같은 걸 먹었는데 그 맛이 다르다거나, 작년에 갔던 여행지를 똑같이 올해 다녀왔는데 작년만큼 즐겁고 신기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원하는 것을 전부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내 마음을 백 퍼센트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어느 정도를 지녀야지만 “아, 됐다. 난 정말 행복하다. 참 좋다!”라며 만족할 수 있을까요?
매우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보리살타는 이런 이치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세상에 살면서는 온전히 만족스럽고 행복하기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숲으로 들어갔지요. 끝없이 바람을 추구하는 세속을 벗어나는 일에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가장 커다란 이로움과 행복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보리살타는 부유한 집의 환락과 욕망을 모두 버리고 히말라야 산으로 들어가서 이리저리 유행하는 선인(仙人)이 되어 살아갔습니다. 아무 것도 지니지 않으니 마음이 편안했고 몸도 가벼워졌습니다. 그는 그런 몸과 마음으로 명상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그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보리살타 곁에는 언제나 5백 명의 수행자들이 늘 함께 하였지요.
우기에 접어든 어느 날, 보리살타는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히말라야를 내려왔습니다. 그는 바라나시 도시를 이리저리 다니며 탁발하면서 지내다가 왕의 정원에 이르렀습니다. 왕은 명망이 높은 숲 속 유행자(보리살타)가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정원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말할 수 없이 행복했습니다. 그는 서둘러 정원으로 달려가서 우기 넉 달 동안 보리살타와 그 제자들에게 넉넉하게 공양을 올려 어려움 없이 명상을 하며 안락하게 지낼 수 있도록 후원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왕의 공양을 받으며 우기 넉 달을 안락하게 지낸 뒤, 보리살타는 왕에게 작별인사를 고했습니다. 자신들이 머물던 히말라야로 돌아가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왕이 청했습니다.
“존경하는 스승이시여, 당신은 이제 연로하신 몸인데 어떻게 히말라야 산에서 지내시겠습니까? 수행도 충분히 하셨으니 굳이 히말라야로 가실 필요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돌려보내시고 스승님께서는 이곳에 그냥 머물러 주십시오.”
왕의 청을 들은 보리살타는 가장 나이 많은 제자에게 오백 명의 수행자 무리를 맡기며 말했습니다.
“그대에게 이들을 부탁하오. 자, 이제 그대는 히말라야 산으로 가시오. 나는 이 왕의 정원에서 그냥 머물겠소.”
최연장자인 제자는 제자들을 거느리고 히말라야 산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내다가 문득 왕의 정원에 머물고 있는 보리살타 스승을 뵙고 싶어졌습니다. 그는 동료와 제자들에게 작별을 고했습니다.
“나는 스승님을 뵙고 인사를 여쭙고 오겠습니다. 당신들은 걱정하지 말고 이곳에서 지내십시오.”
제자는 홀로 히말라야를 내려와서 바라나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왕의 정원에 이르러 스승에게 절을 올린 뒤 낡아빠진 돗자리 한 장을 깔고 스승 곁에 누웠습니다. 그토록 뵙고 싶었던 스승을 만나 그의 곁에 누우니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었지요.
바로 그때 왕이 행차했습니다. 위엄을 갖춘 왕은 스승인 보리살타에게 절을 올린 뒤에 한쪽에 물러나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는 왕을 보고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누운 채 이렇게 읊조리고 있었지요.
“아, 좋다. 참 좋다. 아, 행복해라.”
감히 왕의 행차에도 일어나지 않고 드러누워 있는데다 태평스레 기분 좋다며 읊조리고 있는 그 수행자의 모습에 왕은 불쾌해졌습니다. 그는 스승인 보리살타에게 비꼬는 심정으로 말했습니다.
“스승님, 이 수행자는 뭔가 실컷 먹었나 봅니다. 그러니 저렇게 기분 좋다고 흥얼거리면서 느긋하게 누워 있겠지요.”
그러자 스승인 보리살타가 말했습니다.
“대왕이여, 이 수행자는 출가하기 이전에는 그대와 똑같은 왕이었습니다. 이 수행자는 왕으로서 온갖 권세를 누리고 호화로운 궁정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무기를 손에 쥔 수많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도 늘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서 숲속 수행자가 된 그는 지금 저렇게 행복에 겨워 자신도 모르게 환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갖 욕망을 버리고 떠남에서 얻은 즐거움과, 명상에서 오는 기쁨을 만끽하며 살고 있는 지금이 저리도 좋다고 하는군요.”
보리살타는 왕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들려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를 지킬 일도 없고
그가 다른 사람을 지킬 일도 없다.
그 어떤 욕망에 애태우지 않고
왕이여, 그는 즐겁게 누워 있다.
스승에게 사연을 전해들은 왕은 덩달아 즐거워졌습니다. 그는 행복한 마음으로 보리살타에게 절을 하고 물러갔지요. 스승인 보리살타 곁에서 낡은 돗자리 한 장을 깔고 누워서 행복을 만끽하던 제자도 스승에게 절을 하고 히말라야로 돌아갔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히말라야를 떠나 왕의 정원에서 살아간 보리살타는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었고, 낡은 돗자리 하나를 깔고 누워 즐거워한 수행자는 밧디야 존자로서, 부처님 제자 가운데 ‘가장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찬탄을 부처님에게 들었던 인물입니다.
(본생경 10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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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백화점의 고급브랜드 매장에서 일을 했다는 어떤 사람의 글을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 매장으로 아주 멋지게 차려 입은 젊은 여인이 들어왔는데 양손에는 잔뜩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지요. 그 여인이 매장을 둘러보면서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무얼 사야 기분이 좋아질까?”
이 글을 인터넷에 올린 사람은 이 한 마디에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고급브랜드 매장에서 일하며 단골손님들의 우아하고 호화로운 차림새와 쇼핑행태를 보면서 자신도 열심히 일해서 저 손님들처럼 살겠노라고 생각하던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글쓴이는 그 매장 손님의 모습을 보고 곧 사표를 내고 나왔다고 글을 올렸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양손 가득 거머쥐고도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란 것은 조금 다른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지요.
우울하고 불행한 감정을 견디지 못하는 건 본능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침체된 기분에서 빠져 나오고 싶어 정신없이 물건을 사들이고, 자기 몸과 주변 환경을 조금이라도 더 자기 마음에 들게 가꿉니다. 나를 기분 좋게 해주는 것을 가까이 두고, 또 기분 좋은 상태가 오래 지속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나는 행복하다’라고 정의내릴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의 자리는 누가 봐도 가장 행복한 경지입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다 가졌으니까요. 밧디야 스님은 부처님에게서 “출가한 비구들 가운데 신분이 높기로 으뜸”이라는 말을 들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높디높은 왕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했습니다. 출가자가 된다는 것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럼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요. 어떻게 인생의 즐거움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느냐고요.
하지만 숲에서 수행하던 밧디야는 오히려 이렇게 탄성을 지릅니다.
“아, 좋아라. 지금 이렇게 사니까 정말 좋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은 행복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속세를 떠나 출가자가 되어 산다는 것은 세속의 즐거움과 세속의 가치를 포기하는 일이지, 그렇다고 해서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게 가져서 더 행복하고, 거리를 두어서 더 편안하고, 꽁꽁 숨겨둘 재산이 없으니 도둑맞을 걱정은 처음부터 없고,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것을 빼앗으려는 자들도 아예 얼씬거리지 않습니다. 세속에서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하고 더 즐겁고 더 평화롭기 때문에 어떤 주제에 집중해서 사색하거나 명상하는 일이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스님들의 깨달음의 시를 모은 경전 『테라가타』에는 밧디야 존자의 시 24편이 담겨 있는데, 그 시는 한결같이 한 끼의 거친 식사를 하고 남루한 옷 세 벌을 지니고 나무 아래나 한적한 숲에서 지내도 만족스럽다는 내용입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예전에 높고 둥근 성벽 안에서/견고한 망우가 있는 집에서/손에 칼을 든 자들의 호위를 받았으나/나는 두려움에 떨며 지냈었다.//다행하게도 이제는 전율하지 않고/두려움과 공포를 버리고/나 밧디야는/숲속에 들어가 선정에 든다.”(전재성, 역주 『테라가타』 중에서)
밧디야가 호위병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면서 세상에서 가장 포근하고 호화로운 침상에 누워 잠을 청해도 불안했었다네요. 많이 가질수록 안심하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가질수록 오히려 불안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전생에도 그는 왕위를 박차고 나와서 낡아빠진 돗자리 하나에 꿀잠을 자고, 세속의 권력자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고 본생경에서는 말합니다. 탁 트인 숲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평화롭고 태평스러웠으니, 부처님이 밧디야 존자를 가리켜서 ‘제일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 찬탄할 만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