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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알아두면 쓸데있는 불교 공부

부처님이 오신 뜻

  • 입력 2022.04.23

어떤 시인은 5월엔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노래했다. 그래서일까 5월이 되면 마치 맑은 냇물에 눈을 씻은 듯 세상이 화사하다. 날마다 생명력이 더해가는 신록의 싱그러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불자에게 진짜 좋은 일이란 부처님을 맞이하는 일일 것이다. 신록이 세상을 싱그럽게 한다면 부처님을 맞이하는 것은 내면의 생명을 깨우는 일이다. 밖으로는 5월의 신록이 눈부시고, 안으로는 내면이 밝아지니 안팎이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마명(馬鳴)보살은 불교문학사에 수작으로 손꼽히는 『붓다차리타』를 지어 부처님의 생애를 서사시로 노래한 바 있다. 부처님의 탄생과 관련된 대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카필라 국의 왕비 마야 부인은 여섯 개의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오랫동안 기다리던 왕자를 회임하게 된다. 마명보살은 “천녀와 같은 왕비 마야는 길상의 씨를 받아들였다.”고 표현했다. 세상을 밝힐 상서로운 광명이 한 줄기 꿈을 타고 인간계로 내려온 것이다.

출산이 임박하자 마야 부인은 풍습에 따라 친정 콜리 성으로 가다가 꽃들이 만발한 룸비니 동산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싱그러운 생명력으로 약동하는 봄동산을 산책하던 왕비는 무우수(無憂樹) 가지를 잡고 흩날리는 꽃잎 속에서 태자를 출산했다. 태자는 이른 아침 대지를 붉게 물들이는 햇살처럼 빛났으며, 몸에서 솟아난 광채는 마치 태양이 등잔불을 제압하듯 눈부셨다.

대지는 바람에 밀려가는 배처럼 잔잔하게 진동하고, 하늘에는 꽃비와 전단향 향기가 흩날렸다. 아홉 마리 용이 나타나 태자를 목욕시키고, 푸르고 붉은 연꽃들은 꽃비처럼 쏟아지니 룸비니 동산은 신비로움으로 충만했다.

하늘과 땅의 축복 속에 탄생한 태자는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탄생게를 외쳤다. 태자의 걸음걸음마다 고운 연꽃들이 피어나 양탄자처럼 빛나는 태자의 발을 떠받쳤다. 태자는 오른 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보리(菩提)를 위해 유정의 이익을 위해 태어났으니,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탄생이 되게 하리라.”는 사자후를 토했다.

태자의 탄생은 첫째 깨달음을 위한 것이며, 둘째 중생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이번 탄생이 최후의 탄생이 되리라고 했다. 진리를 깨닫고, 일체 중생을 구제하여 다시는 사바세계로 올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다짐이 담겨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탄생게는 『수행본기경』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네. 삼계가 모두 고통이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吾當安之).”가 그것이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는 내용은 얼핏 보면 오만과 독선처럼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부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이 말씀에 담긴 의미가 드러난다.
부처님은 비구의 숫자가 60명이 되었을 때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전도(傳道)를 떠나라!’고 선언하셨다. 그때 부처님은 “나는 신과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너희들도 신과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인도사회에서 인간을 속박하는 것을 두 가지로 요약한 셈이다. 하나는 신으로 대변되는 종교적 굴레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으로 대변되는 욕망과 권력에 의한 억압이다. 부처님은 진리를 깨달아 신들의 허구를 깨침으로써 낡은 종교와 형이상학적 인식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스스로의 욕망을 제압함으로써 인간의 굴레에서 해탈하신 분이다.
부처님은 진리를 깨달은 비구들을 향해 ‘그대들도 신과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라고 선포하셨다. 따라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바른 진리를 깨달으면 위로는 신들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아래로는 인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스스로 존귀함을 회복하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부처님 한 분만이 아니라 진리를 깨달은 모든 사람, 참다운 법을 체득한 모든 존재는 하늘 위와 하늘 아래서 가장 거룩한 존재라는 것이다. 결국 탄생게는 인간존엄성에 대한 선언이자 생명의 참다운 가치에 대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태자의 탄생을 지켜본 사람들은 “쇠 중에는 황금이 최고이며, 산 중에는 수미산이 최고이듯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 탄생했다.”며 칭송했다. 수미산처럼 우뚝 솟아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기에 그 분을 ‘세존(世尊)’이라 불렀으며, 지혜와 복덕을 겸비하여 만인에게 존경받는 분이기에 ‘양족존(兩足尊)’이라고 불렀다.
법 중에 최고의 법, 법왕자(法王子)가 탄생하던 그 날 모두가 기뻐했지만 욕계천만은 불안에 떨었다. 세상을 지배하던 칠흑 같은 어둠의 세계, 욕계는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마명보살은 “이 세상 구제하러 스승 나오시니 세상 사람들은 더 없이 안온한데 홀로 욕계천만이 기뻐하지 않았다.”고 노래했다.


원력으로 오신 부처님
『본생담』에 따르면 부처님은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시기 전에는 도솔천 내원궁에 계시던 호명보살이었다. 그곳에서 4천년 동안 설법하며 하늘 사람들을 교화하고 계시다가 사바세계의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력으로 마야왕비의 태중으로 강림하셨다는 것이다.
도솔천(兜率天)은 지족천(知足天)으로 번역되는데 ‘다섯 가지 욕구가 충족된 하늘’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늘나라로 가고 싶어 종교를 믿지만 부처님은 거꾸로 하늘나라의 즐거움을 버리고 사바세계로 강림하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업력(業力)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고통 가득한 사바세계로 오신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중생구제라는 원대한 원력(願力)의 힘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의 탄생을 원력수생(願力受生)이라고 한다. 스스로 선택한 자발적 강림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탄생에 대해 『법화경』에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고 했다. 일부러 인간으로 태어나 출가하고, 치열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마침내 대자유의 해탈세계로 들어가는 ‘개시오입(開示悟入)’의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부처님은 오셔도 온 바가 없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여래는 어디로부터 오고, 어느 곳으로 가는 바도 없다(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고 했다.
부처님은 비록 탄생을 보이셔도 인간과 같은 태어남이 아니며, 열반을 보이셔도 인간과 같은 소멸이 아니다. 부처님은 비록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어 수행하여 성불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지만 이미 오래 전에 성불한 부처님이다. 이를 『법화경』에서는 ‘구원실성(久遠實成)’이라고 한다. 인간으로 오시어 수행하고 성불하는 과정 등은 중생을 일깨우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본래부터 부처님이었다는 것이다.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일깨우러 오신 부처님
하지만 마음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하는 선종(禪宗)에서는 부처님의 구원실성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일례로 성철스님은 부처님께서 사바세계로 오신 것은 자신이 수행하여 깨닫기 위함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본래 성불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불교의 근본목적은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성불’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성철스님은 부처님이 본래 성불하셨듯이 중생도 본래 부처라는[本來是佛]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해 오셨다고 했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마음과 부처 그리고 중생은 차별이 없다.”고 하였으니 부처님이 구원실성이라면 중생도 구원실성인 것은 자명하다.
경전과 선사들의 말씀을 돌아보면 부처님 오심을 맞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연등을 밝히고 복을 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 스스로 내면에 지혜의 등을 밝혀야 하고, 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엄청난 사실을 깨달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부처님 오신 날은 중생이 부처임을 깨닫고 인간존엄을 선언하는 날이며, 우리들이 본래 깨달은 부처이므로 부처님과 같이 살아야 함을 자각하는 날이다. 그런 자각이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 무한한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고, 모든 중생들을 부처님처럼 공경할 수 있다.
내가 본래 부처라는 자존감을 가질 때 물질과 권력에 휘둘리는 일은 없어지며, 다른 사람을 부처님처럼 존중할 때 갈등과 대립은 저절로 해소된다.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들이 부처님처럼 살아가는 순간 사바세계는 고통의 바다가 아니라 부처님들의 나라 불국토가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처님 오신 날은 우리가 부처님처럼 살아가는 날이며, 중생이 부처로 탄생하는 날이다. 이렇게 인식이 전환될 때 부처님 오신 날은 과거 어느 한 순간을 기리는 날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재의 역사가 되고, 사바세계는 수많은 부처님이 탄생하는 룸비니 동산이 된다.

 

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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