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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이미령의 본생경 이야기

양이 웃다가 통곡한 사연

  • 입력 2022.05.28

옛날 바라나시에서 브라흐마닷타 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 일입니다, 하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 신의 계시를 받던 사제(바라문)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돌아가신 분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공양제를 올려야겠다.”

그리고 양 한 마리를 붙잡아서 제자들에게 일렀지요.

“이 양을 개울로 끌고 가서 목욕시킨 뒤에 목에 화환을 걸고 악마를 물리치는 수인(手印)을 찍고 화려하게 치장한 뒤에 데리고 오너라.”

사제의 명을 받은 제자들이 양을 개울로 끌고 가서 목욕시키고 화려하게 꾸민 뒤에 잠시 개울가에 세워두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양이 갑자기 사람처럼 크게 웃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그토록 지독했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됐구나.”

양은 이렇게 사람의 말을 하면서까지 행복에 겨워 껄껄껄 웃어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곧이어 양은 대성통곡하며 말했기 때문입니다.

“아, 안타까워라. 이 일을 어찌하나.”

제자들이 양에게 이유를 묻자 양이 말했습니다. 

“그대 스승 앞에서 내게 웃었다가 통곡한 이유를 다시 한 번 질문해다오.”

제자들이 양을 끌고 스승 앞으로 가서 이 기이한 일을 보고하자 스승이 양에게 물었습니다.

“양이여, 그대는 왜 크게 웃었는가?”

양은 가만히 생각을 모았습니다.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의 힘으로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상기하고서 이렇게 말했지요.

“사제여, 나는 전생에 지금의 그대처럼 아주 권위 넘치는 사제였습니다. 나는 돌아가신 분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혼을 달래주려고 양을 죽여서 희생제를 올렸습니다. 그때 양 한 마리의 머리를 잘라 죽인 행위의 대가로 나는 499번의 생애 동안 머리가 잘리는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생이 내게 있어 최후에 해당하는 5백 번째의 생애입니다. 그러니 오늘 목이 잘리는 것은 두렵지만 이제 살생의 괴로운 과보에서 벗어날 것을 생각하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크게 웃어댄 것입니다.”

사제가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내 대성통곡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양이 대답했지요.

“나는 양 한 마리를 죽여서 5백 생애 동안 머리가 잘리는 괴로움을 받다가 오늘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었지만 이 사제는 나를 죽이면 내가 받은 것과 똑같이 앞으로 5백 생에 걸쳐 머리가 잘리는 괴로움을 받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자 그대가 가여워 견딜 수가 없어서 눈물을 흘리며 목 놓아 울었습니다.”

양의 말을 듣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만 같았습니다. 사제는 말했습니다.

“양이여, 나는 그대를 죽이지 않겠다.”

“사제여, 소용없습니다. 그대가 나를 죽이든 죽이지 않든 나는 오늘 죽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죽이지 않더라도 양이 죽게 되면 어쩐지 자기에게 그 과보가 올 것만 같아서 사제는 얼른 대답했습니다.

“양이여, 무서워하지 말라. 나는 그대를 보호하겠다. 제자들과 함께 그대를 둘러싸고 빙빙 돌면서 그대의 무병장수를 기원해주겠노라.”

“사제여, 내가 저지른 잘못은 너무나 크고 강력하기 때문에 그대가 아무리 나를 보호해준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도 사제는 제자들에게 고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이 양을 죽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을 거느리고 양과 함께 무리를 지어서 빙빙 돌며 죽음의 저주를 푸는 기원을 행했습니다. 사제와 제자들에게서 풀려난 양은 곧바로 어느 바위산 정상 가까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수풀에 들어가 머리를 쳐들고서 잎을 먹기 시작했는데 마침 그때 그 바위산 정상에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바위 한 귀퉁이가 쪼개져 길게 늘인 양의 목에 떨어지는 바람에 양은 머리가 잘리고 말았습니다. 이 처참한 현장을 보려고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때 보리살타는 바로 그곳에서 나무신(樹神)으로 태어나서 살고 있었지요. 나무신은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허공으로 날아올라 공중에 두 발을 맺고 앉아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살생의 악업에 따른 과보가 이처럼 엄중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감히 살아 있는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못할 것입니다.”

보리살타는 거듭 시를 읊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이 행동은 괴로운 삶을 불러올 것이다’라고 안다면,

살아 있는 사람이

살아 있는 자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

살아 있는 자를 죽이면 

지독한 슬픔을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읊는 보리살타의 음성은 두려움에 가득 차올랐습니다. 살생에 따른 과보의 괴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위대한 사람(보리살타)’이 무시무시한 공포에 덜덜 떨면서 설법을 마치자 모여 있던 사람들도 오싹 하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생명을 해치면 받게 되는 괴로움이 지옥에서 받는 고통과 똑같다는 말이로구나. 생명을 해치는 일이 그토록 엄중할 줄이야…’

사람들은 지옥의 무서움에 겁을 먹고서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일을 멈추었습니다. 나무신인 보리살타는 설법을 마친 뒤에 사람들에게 다섯 가지 계를 지키도록 간절하게 일렀고, 이후 자신의 업을 따라서 또다시 다른 생을 받아 그곳에서 보살로서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 자리에 모여서 설법을 듣던 사람들도 보리살타의 간곡한 일러줌을 지키며 다른 이에게 넉넉하게 베푸는 등 선업을 행하며 남은 생을 살았지요. 그들이 죽은 후 신들의 나라에 태어나 그곳에서 온갖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며 지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선업에 따른 즐거운 과보를 누렸기 때문이지요. 

이때의 나무신의 몸으로 태어난 보리살타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몸이었습니다. (본생경 18번째 이야기)이 이야기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제타숲에 머물러 계실 때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 무렵 사람들은 세상을 떠난 친족들을 제사지내려고 수많은 염소와 양을 죽여서 ‘죽은 자를 위한 공양물’로 제사상에 올렸습니다. 수행승들이 이런 광경을 보고서 부처님에게 여쭈었지요.

“스승이시여, 지금 사람들은 수많은 산 생명의 목숨을 빼앗아서 ‘죽은 자를 위한 공양물’이라고 하는 것을 제사상에 올리고 있습니다. 스승이시여, 이런 일을 하면 이익이 있습니까?”

부처님이 대답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설령 ‘죽은 자를 위한 공양물을 올리자’라고 말하고서 실제로 행했다고 하더라도, 산 생명을 죽인다면 아무런 이익도 오지 않는다. 전생에도 현자가 공중에 앉아서 설법을 하며 이와 같은 경우의 재난을 들려주어서 사람들에게 살생을 멈추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생사를 거듭 거쳐 오면서 이 가르침을 잊어버린 사람들이 지금 그때와 똑같은 행위를 거듭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양의 전생담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동서고금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니 새삼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점을 두 가지 짚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수행승들의 말 속에 담겨 있는 ‘수많은 산 생명의 목숨을 빼앗아서 죽은 자를 위한 공양물로 만든다’라는 내용입니다. 제사상을 차린다는 것은 고인을 기리는 마음과 고인에게 따뜻한 음식을 올리고 싶은 정성에서 하는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하지만 수행승들의 말을 보면, 이 얼마나 어불성설인가요? 이미 죽어버린 자를 위해 지금 살아 있는 자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것 말입니다. 고인을 간절한 마음으로 추모하고 싶다면 살아 있는 여린 생명을 더욱 보듬고 아껴주고 보호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고인의 이름으로 여린 생명을 돌보고 풀어준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선업의 제사상은 없겠습니다. 

둘째는, 부처님 말씀에 담겨 있는 내용 중에서 음미해볼 만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살생해야겠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저 돌아가신 분을 위해 제사상(공양물)을 차리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뿐이고, 제사상을 차리려다보니 동물을 죽인 것이지요. 그런데 부처님은 바로 그걸 지적하십니다. 살생하겠다는 마음이 아닌, 고인을 위해 제사상을 차리겠다고 ‘말’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고 해서 그 후손이 살생의 업을 피해가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게다가 그 살생이라는 악업에 따른 괴로운 과보를 이미 돌아가신 분이 대신 받아줄 것도 아닙니다. 

몇 해 전, 모임에서 뒤풀이를 하려고 식당을 찾다가 가장 가까운 곳에 들어갔습니다. 하필 횟집이었지요. 식당 앞 수족관에 유난히 큰 물고기 한 마리가 비좁지만 헤엄치고 있었는데, 식사를 마친 뒤에 나와 보니 그 생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말하더군요.

“조금 전까지 살아 있던 그 녀석이 우리 뱃속에 들어 있네요.”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서늘한 충격이 지금껏 생생합니다. 너무 배고팠던 것도 아니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꼭 먹어야 했던 것도 아니었지요. 그저 흥겨운 뒤풀이를 위해 방금 전까지 꼭 나처럼 헐떡헐떡 숨 쉬고 있던 생명 하나를 해치웠던 것입니다. 그 물고기는 비좁은 수족관 속에서, 그리고 도마 위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세상을 살아가는데 00주의를 고집하는 것도 어찌 보면 하나의 편견이요, 단견(斷見)일 수 있습니다. 속세의 범부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직업이든 가져야 하고, 또 그런 생산 활동으로 이 사회와 세상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미 우린 충분히 남의 목숨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얼 먹어도 다 어떤 생명이 희생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굳이 또 다른 살생을 저질러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다른 이의 행복을 덜 해치려는 쪽으로 궁리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사제에게 끌려간 양이 호탕하게 웃다가 대성통곡한 이유를 듣자하니, 지나친 육식, 환경오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리는 우리의 운명이 보입니다. 

 

 

이미령 (경전 이야기꾼, 불교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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