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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알아두면 쓸데있는 불교 공부

하지(夏至)와 태양의 부처님

  • 입력 2022.05.28

어느덧 한 해의 반환점을 돌아가는 6월이다. 동지부터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한 낮은 하지(夏至)가 되면 절정에 이른다. 기후변화 탓인지 벌써 폭염 소식이 들려오고, 파키스탄에서는 다리가 녹아내렸다고 한다. 내용인즉슨 만년설이 녹아 홍수가 났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보면 낮이 길어져 일조량이 늘어나는 것이 마냥 반갑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태양이나 일조량 탓이 아니라 인간이 자초한 문제일 뿐이다.

 

 

하지의 햇살과 황금가지

태양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태양의 빛이 없다면 지구는 물론 태양계 자체가 암흑천지가 된다. 태양의 열기가 없다면 지구는 영하 수백 도에 달하는 얼음덩어리에 불과할 것이다. 태양의 빛과 온기가 있어 생명이 살 수 있는 지구환경이 조성되고 생명이 살 수 있다.

식물은 햇살을 먹고 산소를 토하며 생명의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이로 인해 초식동물의 먹이가 생기고, 여기서 육식동물이 살아갈 수 있는 먹이사슬이 형성된다. 황량한 겨울 들판을 황금 들판으로 만드는 것도 태양의 힘이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했지만 그 물조차 태양이 없다면 있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태양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이런 이유로 태양은 여러 문화권에서 특별하게 추앙받아 왔다.

영국의 민속학자이자 신화학자인 프레이저(J. G. Frazer)는 그의 저서 『황금가지』에서 태양을 신성한 존재로 믿어왔던 풍습에 주목했다. 그 중 하나는 하지에 겨우살이를 채취해 말린 뒤 축사(畜舍)에 걸어 두는 북유럽의 풍습이다. 하지에 채취한 겨우살이를 햇빛에 말리면 황금색을 띄기 때문에 이를 ‘황금가지(Golden bough)’라고 부른다. 황금가지를 축사에 걸어두면 트롤(troll)이나 악귀들로부터 가축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럼 왜 하고 많은 나무 중에 겨우살이일까? 프레이저에 따르면 겨우살이는 주로 참나무에 서식하는 기생식물인데 참나무는 벼락을 많이 맞는 나무다. 고대로부터 벼락은 신의 계시나 신성한 하늘의 메시지로 여겼다. 번개를 신성한 이미지로 보는 것은 불교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현장법사가 번역한 『금강경』의 제목 맨 앞에는 ‘능단(能斷)’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이는 ‘바즈라체디카(Vajracchedika)’를 번역한 것인데, ‘번개(Vajra)’와 ‘자르다(cchedika)’라는 뜻을 담고 있다. 번개의 날카로운 빛이 순식간에 어둠을 가르고 세상을 환히 밝히는 것처럼 반야의 지혜도 번뇌를 단번에 끊어버림을 상징하는 말이다.

아무튼 참나무는 번개의 신성함을 온 몸으로 세례 받은 존재로 보았고, 그런 참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도 신성한 힘을 지녔다고 본 것이다. 나아가 황금빛으로 쏟아지는 햇살은 태양의 방사물(放射物)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하지는 1년 중 태양의 방사물이 가장 많이 쏟아지는 날이자 어둠이 가장 쇠약한 날이다. 그런 날 채취해 말린 겨우살이는 황금빛의 신성한 기운이 응축된 부적처럼 여겨졌고, 축사에 걸어두면 어둠의 세력과 악귀를 막아낸다고 보았다.

마치 우리가 동짓날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 붉은 팥죽을 쑤어 먹고 뿌리는 것과 유사하다. 엄청난 빛을 가진 벼락과 태양 등을 신성한 것으로 보았기에 우리도 벼락 맞은 나무를 신성시 했다. 불자들이 벽조목(霹棗木) 염주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도 이런 이치라고 할 수 있다. 벽조목이란 벼락 맞은 대추나무를 말하는데 신성한 빛의 세례를 받은 나무 자체를 신성하게 본 것이다.

 

 

태양신 수리야와 비로자나불

태양이 있어 어둠을 물리치고, 생명이 살 수 있기에 고대인들도 태양을 ‘태양신(sun god)’으로 숭배하고, 일식(日蝕)으로 태양이 빛을 잃으면 나쁜 징조로 보았다.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 케프리(Khepri)는 삶의 재생과 창조를 관장하는 신으로 여겼고, 파라오(Pharaoh)는 그런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믿었다.

고대 인도의 힌두교에서도 태양은 수리야(Surya)라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수리야는 일곱 마리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하늘을 가로질러 간다고 보았다. 사람들은 매일 하늘을 가로지르는 눈부신 태양을 통해 지고한 존재를 보고자 했다. 사비투르(Savitri) 또한 태양과 관련된 여신인데 그녀는 햇빛을 통해 만물의 성장을 관장한다고 믿었다. 여신은 인간에게는 악마·병고·죄악을 떨쳐내고 대신 행운·장수·지혜를 준다고 믿었다.

태양을 숭배하는 종교적 현상은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불교 또한 빛과 태양에 대한 비유가 무수히 등장한다. 부처님의 부족인 샤카족(Sakya)은 ‘태양의 후예’로 불렸으며, 마명보살은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한 싯다르타 태자를 ‘대지에 떠오르는 태양’이라고 비유했다.

부처님을 태양에 비유하는 것은 신화에만 그치지 않고 여러 경전에도 등장한다. 『화엄경』에 등장하는 비로자나불 역시 태양을 지칭하는 말이다. 비로자나란 산스크리트어로 ‘바이로차나(Vairocana)’인데 ‘찬란한 빛’ 또는 ‘태양’을 의미한다. 햇빛이 모든 곳을 밝게 비추듯 부처님의 지혜광명 또한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비추므로 ‘광명변조(光明遍照)’라고 번역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을 대적광전(大寂光殿) 또는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고 하는데 ‘고요한 빛의 집’, ‘큰 광명의 집’이라는 뜻이다.

대승불교 말기에 등장한 밀교 역시 대일여래(大日如來)를 주불로 한다. 대일이란 ‘마하바이로차나(Mahavairocana)’의 번역인데 이는 비로자나에서 ‘마하’라는 수식어가 더 붙었을 뿐 본질은 태양을 뜻한다. 대일여래는 위대한 태양처럼 세상 곳곳에 빛을 비춘다는 뜻에서 ‘대일변조(大日遍照)’ 또는 ‘변조여래(遍照如來)’ 등으로 번역되었다.

부처님을 태양에 비유하는 직접적인 표현은 ‘불일(佛日)’이다. ‘태양의 부처’ 또는 ‘부처의 태양’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 표현은 대장경 등 불교문헌에 무려 3천 건이 넘게 검색된다. 대표적으로 『장아함경』에는 ‘불일광보조(佛日光普照)’라는 표현이 나온다. ‘부처님의 햇빛이 널리 비춘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지혜를 태양에 비유하며 지혜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다. 또 『대승본생심지관경』에서는 “부처님의 태양은 천개의 광명으로 늘 세상을 비춘다(佛日千光恒照世).”고 했는데, 이는 불법의 보편성과 영원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둠을 밝히고 중생을 성숙시키는 태양의 부처님

『수행본기경』에서는 “부처님은 태양처럼 빛나며(佛日照) 모든 생명의 잠을 깨운다.”고 했다. 캄캄하게 잠든 중생을 일깨우는 진리의 빛이라는 것이다. 『불본행경』에서는 “부처님의 태양이 세상에 나와 찬란한 빛으로 풍요로운 진리의 가을 만든다(佛日出於世 照曜法豐秋).”고 했다. 『화엄경』에서는 “맑은 햇살이 일천의 광명을 방사하여(淨日放千光) 본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듯 부처님의 태양도 그와 같이 가고 오지 않고 세상의 어둠을 밝힌다.”고 했다. 또 “밝고 맑은 태양(明淨日)이 이익을 주지 않는 곳이 없듯이 부처님의 태양도 이와 같아 세상에 출현하여 비록 믿는 마음이 없어도 중생을 이롭게 한다.”고 했다. 『금광명경』에서도 “부처님의 대자비는 일체의 어둠을 소멸시킨다(佛日大悲 滅一切闇).”며, 자비의 근간은 무명을 밝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부처님은 다양한 맥락에서 태양과 비유되는데 『대일경소』에 따르면 대일여래를 태양에 비유하는 것에 대해 3가지로 풀이한다. 첫째, 어둠을 제거하고 두루 밝힘(除暗遍明)이다. 하늘의 태양은 낮에만 빛나지만 부처님의 지혜는 낮밤이 없기에 ‘큰 태양[大日]’이라고 했다. 둘째, 태양이 모든 생명을 성장시키듯 부처님도 모든 중생들이 각자의 본성을 발현시키도록 역할을 한다(能成衆務)는 것이다. 셋째, 태양이 시작도 없고 소멸도 없듯이 부처님의 지혜도 영원하다(光無生滅)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눈부신 태양이 모든 생명들이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주는 것처럼 부처님 또한 진리의 자양분으로 지혜의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이렇게 부처님이 태양에 비유됨으로 『대혜어록』에서는 ‘불일증휘 법륜상전(佛日增輝 法輪常轉)’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부처님의 태양이 더욱 빛나라’는 뜻인데 그것은 곧 ‘진리의 수레바퀴가 항상 굴러가는 것’을 의미한다.

초여름 햇살이 뜨거운 지금 전국의 선원에서는 하안거 수행이 한창이다. 수행은 곧 ‘마음 밭[心田]’에 지혜의 광명을 담는 과정이다. 불교를 믿는 것도 지혜 광명으로 마음의 땅을 풍요롭게 일구는 것이다. 내면에 지혜의 광명이 충만할 때 우리들의 마음은 풍성해지고, 고난의 겨울을 이길 수 있는 찬란한 힘을 얻게 된다.

 

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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