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대승사 사면석불( 四面石佛, 경북 유형문화재 제403호)
지난 2020년 1월호에 시작해서 같은 해 6월호(5회차)를 끝으로 연재를 멈췄던 ‘가피 순례’를 다시 시작한다. 2년 1개월의 긴 기다림 끝에 설렌 발걸음이 향한 이번 순례지는 경상북도 문경 사불산(四佛山)의 대승사와 그 부속 암자 윤필암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로서, 신라 진평왕 9년(587)에 창건된 대승사에는 고려 후기(1380) 나옹 화상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지어진 윤필암 외에도 묘적암, 상적암, 보현암 등 오래된 암자가 여럿이다. 그리고 천오백여 년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국보 제321호) 등의 국보와 보물 등도 적지 않다.
문경은 지리적으로 경북 내륙에서 서울로 향하는 지름길 길목이어서, 예부터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였다. 일찍이 후삼국시대에는 후삼국이 서로 뺏고 빼앗기는 각축장이었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그 전략적 중요성이 더욱 크게 부각되었다. 특히 문경새재는 영남으로 향하는 첫 관문이며 경상북도의 북쪽 울타리인 까닭에 곳곳에 산성이나 관문을 겹겹이 설치해서 유사시에 통행을 제한해왔다.
‘문경(聞慶)’이란 이름은 예전 한양에서 새재를 넘으면 이곳에서 처음 경상도 말을 듣는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산세가 깊고 험함에도 불구하고 신라시대부터 많은 절들이 들어섰다. 진평왕 10년(588)에 창건된 김룡사, 지증 대사가 세운 구산선문의 봉암사, 그리고 김룡사보다 한 해 먼저(587) 지어진 사불산 대승사도 문경에 자리 잡고 있다.
천오백여 년간 불법을 지켜온 고찰, 사불산 대승사
사불산 대승사(大乘寺,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8번지)는 산 아래 마을에서 골짜기를 따라 한참 숲길로 들어가다가 산 중턱으로 올라가는 경사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대승사를 감싸 안은 사불산(四佛山, 913미터)은 공덕봉을 중심으로 곳곳에 솟구친 암석들이 우뚝하다.
신라 진평왕 때 창건된 대승사는 근대 한국불교 정화의 씨앗이 움튼 곳이다. 청담, 성철, 월산 스님이 이곳에서 수행하고 정화의 씨앗을 틔웠다. 특히 대승선원은 성철 스님이 3년간 장좌불와한 곳으로 유명하다.
사찰 창건에 관해서는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와 조선 후기의 『상주읍지』에 기록이 전해온다. 대승사는 천오백여 년의 고찰이나 몇 차례의 화재로 인해 새 전각이 많아서 고졸한 멋이 덜하다. 경사진 곳에 단을 쌓고 터를 닦음으로써 대웅전을 중심으로 뒤편 오른쪽에 삼성각, 응진전, 극락전, 명부전이 단을 달리한 채 자리를 잡고 있다. 대웅전 뒤쪽, 병풍처럼 둘러친 소나무숲이 신성하면서도 단정해서 무척 인상적이다.
대승사는 한때 묘적암, 반야암 등 아홉 개 암자를 둔 큰 사찰이었다. 현재는 묘적암, 윤필암, 총지암 등이 남아 있고, 대웅전을 비롯해서 삼성각, 응진전, 극락전, 명부전, 대승선원 등의 전각과 청련당, 백련당 등의 요사채가 있다. 명부전과 극락전, 삼성각은 17세기 후반에 지어졌고, 대웅전은 1956년 화재로 불에 타서 복원했다.
국보 제321호 대웅전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대웅전 문앞에 서면 문살 문양이 유난히 눈에 띈다. 적당히 빛이 바랜 차분한 색감과 친근한 문양이 마음을 끌어당긴다. 대웅전 불단 한가운데의 석가모니부처님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협시에 미소를 짓고, 불상 뒤쪽에서는 평범치 않은 목각 후불탱의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솜씨가 눈길을 끈다.
국보 제321호(2017. 8. 31)인 목각 후불탱 아미타여래설법상은 관계문서 4매와 함께 문화재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높이 4미터, 폭 3미터 크기의 이 목각탱은 본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후불탱이었다. 목각 후불탱으로는 전국에 다섯 점밖에 없을 만큼 귀한 몸이고 정교한 목각 솜씨 또한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다.
대웅전 마당 양쪽에는 두 기의 노주석(露柱石)이 낯설게 서 있다. 야간 법회나 행사 때 주위를 밝히는 석등의 일종으로, 봉암사와 김룡사 등 국내 사찰 몇 곳에만 남아 있다고 한다. 그 옆을 지키는 불꽃 모양의 향나무에서는 왠지 모르게 참선도량의 날선 기개가 느껴진다.
문화재의 보물창고 대승사
대승사에는 국보 1개와 보물 6개, 지방문화재 7개 등 총 14개의 문화재가 있다. 부속 암자인 윤필암 후불탱화와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지감 등 2개, 묘적암 나옹화상영정 1개를 뺀 나머지 11개가 대승사 대웅전과 극락전, 명부전, 대승선원 등에 골고루 모셔져 있다. 과장하면 대승사 전체를 박물관이라고 할 만하다.
대웅전 뒤편으로 삼성각과 응진전이 나란히 서 있다. 삼성각에는 칠성을 모셨고, 응진전에는 오백 나한이 점잖게 자리 잡고 있어 나한 기도객들이 주로 찾는다.
그 한 단 아래 극락전에도 보물이 있다. 미소가 따뜻한 금동 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634호)과 복장물인데, 아미타여래좌상은 고려 중기 불상의 전통을 이어주는 것으로 추정한다. 다시 그 한 단 아래 명부전의 지장보살 탱화는 1876년 조선시대 고종 때 그려진 지방문화재로서 본디 부석사 무량수전에 있었다고 한다. 명부전은 대승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으로서, 내부에 들어가면 양쪽에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고, 지장보살 주위를 십대왕이 호위하고 있는 모양새다.
성철 스님이 3년 장좌불와한 대승선원
대승사는 참선도량을 지향하고 있다. 현 주지 동참 스님은 대승사의 정체성을 청담, 성철, 월산 스님의 수행가풍을 이어받은 참선도량에 두고, 코로나19 시국에도 꾸준히 참선법회를 열었다. 처음 열 명에서 어느새 70여 명에 이를 만큼, 참선 동참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대승사는 출가 수행자 대상의 대승선원과 재가자 선방인 백련당을 두루 갖추고 있다. 1944년 문을 연 대승선원은 성철, 청담, 경봉, 운허, 효봉, 자운 스님이 함께 승풍 진작을 도모한 수행 터로서 성철 스님이 3년간 장좌불와한 곳으로 진가를 높이고 있다. 현재 결제 중이어서 금동보살좌상(보물 제991호)을 친견하지는 못했다.
재가자 선방인 백련당은 대웅전을 마주 보고 오른쪽 방향에 있다. 툇마루를 낸 정면 11칸의 긴 건물인데, 가운데 세 칸을 양반집 솟을대문처럼 높이고 좌우 양쪽을 행랑채 형식으로 독특하게 지었다.
백련당에는 ‘천강사불(天降四佛)’, ‘지용쌍연(地湧雙連)’,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하늘에서 네 분의 부처님이 하강하고’, ‘땅에서 한 쌍의 연꽃이 솟아났다’라는, 대승사 창건을 표현한 문구가 흥미롭다.
대승사 창건설화가 살아 있는 사면석불
『삼국유사』 「탑상」편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 조에 전해오는 대승사 창건설화는 이러하다. 사면석불(四面石佛, 경북 유형문화재 제403호)에 관한 기록이다.
“죽령 동쪽 백여 리 남짓 되는 곳의 산이 우뚝 솟아 높은 재와 같았다. 진평왕 9년 홀연히 네 개의 면이 1장 정도씩 되는 큰 돌이 붉은 비단에 싸여 하늘에서 산꼭대기로 내려왔다. 그 돌에는 사방 여래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왕이 이 사실을 듣고 수레를 타고 가서 예경하고, 그 바위 곁에 절을 지어 대승사라 하였다. 법화경을 독송하는 비구 망명(亡名) 즉 연경(蓮經)을 외는 자를 청하여 주지로 삼고, 공양석을 깨끗이 하고 분향이 끊이지 않게 하였다. 이 산을 역덕산(亦德山) 혹은 사불산이라고 하였는데, 주지가 죽어 장사를 지내자 무덤에서 연꽃이 피어났다.”
사불암으로도 불리는 이 사면석불은 방형 돌기둥 같은 바위의 동, 서, 남, 북 사방 면에 각각 약사불, 아미타불, 석가여래, 미륵불을 돋을새김했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봉우리 꼭대기에서 모진 비바람을 겪으면서 마모되어 조각 형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동쪽의 약사불이 덜 훼손되었다고 하나 그조차 알아보기 쉽지 않다.
사불암은 대승사에서 윤필암으로 가는 도중, 오른쪽 숲길로 발길을 꺾어서 20분쯤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닿을 수 있다. 작은 산봉우리의 치솟은 너럭바위 위에 서 있다.
어지간한 용기 없이는 다가가기조차 두려우나, 사불암 부처님을 친견해야만 내려다볼 수 있는 사불산의 멋진 경치가 모든 걸 보상해주고도 남는다. 윤필암 사불전과 묘적암이 저 멀리 보이고, 산 아래 마을이 아득히 펼쳐지는 절경이다.
미륵암 터의 마애여래불좌상
경북 유형문화재 제239호로서,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한다. 대승사와 윤필암이 갈라지는 길에서 왼쪽 윤필암 길을 따라 450미터쯤 올라가면 윤필암 입구 직전, 왼쪽에 묘적암 가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을 250미터쯤 따라가면 오른쪽으로 단정하고 편안해 보이는 돌계단이 나타난다. 물음표 모양의 아래쪽에서부터 부드럽게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모양인데, 70여 계단을 올라가면 그 끝에서 마애여래불을 만난다.
높이 6미터, 폭 3.7미터의 큰 바위가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인 모습으로, 머리 위에 바위 갓을 씌워 비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그 덕분에 돋을새김한 상호와 몸집이 비교적 선명하다. 머리 부분 바깥쪽에 연꽃 모양처럼 꽃잎을 새겨 넣어 이채롭다.
비구니 참선도량 윤필암
윤필암(閏筆庵)은 대승사 부속 암자로, 고려 후기(1380) 나옹 화상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각관(覺寬) 스님이 창건하였다. 여러 차례의 중건을 거쳐 1885년 고종의 명으로 창명(滄溟) 스님이 다시 중건하였다고 한다. 1980년대 비구니스님들이 전각 대부분을 새로 지어 현재 사불전, 사불선원, 삼성각, 관음전, 적묵당 등이 남아 있다.
윤필암이란 이름의 유래는 고려 때 목은 이색(1328~1396)이 나옹 화상의 기문을 써준 데서 붙여졌다는 설과 의상 스님의 이복동생 윤필이 머물렀다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근대에는 청담 스님의 딸로서, 최초로 비구니 최고 법계인 명사(明師)를 품수받은 세주당 묘엄 스님의 출가 암자로 유명하다.
비구니 선방 사불선원(四佛禪院)은 장작불로 난방을 하는 전통 구들장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지감(紙龕), 신중탱화, 사불전 뒤쪽의 고려시대 삼층이형석탑 등 지방문화재 5~6점을 보관하고 있다.
윤필암의 대표 전각 사불전(四佛展)은 적멸보궁처럼 불상을 모시지 않고, 사면석불을 바라보면서 기도할 수 있도록 큰 유리창을 만들었다. 큰 창 아래 양옆에 당초문양으로 장식한 작은 창도 특이하다.
코로나19로 중단되었던 <주지스님과 함께하는 화엄성중 가피순례>는 9월 재개 예정이며, 추후 공지하겠습니다.
대승사국보 제321호 대웅전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금동 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634호)
윤필암에서 바라본 사면석불, 마애여래불좌상(경북 유형문화재 제239호)
윤필암 사불전, 사불선원 (四佛禪院)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윤필암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