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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반, 둔황불교벽화를 모사한 중국 화가들
장다첸이 그린 둔황 제 159굴 문수보살봉법회도 벽화 모사도, 1941~1943, 쓰촨 박물관 소장
둔황을 재발견 한 화가들
중국 북서부 간쑤성에 있는 둔황 막고굴은 현재 약 522굴에 이르며 굴마다 불교의 가르침이 담긴 벽화를 그렸다. 벽화의 총 표면적은 약 50,000㎡에 달하며 벽화의 내용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부처님의 본생 이야기가 주로 담겨있다. 둔황은 기원전 138년경에 한나라 군대의 거점이었다. 둔황 지역은 한나라와 주변의 유목민들과의 전쟁 과정에서 국경을 넘어온 상인과 선교사들로 인해 점차 문화·상업의 교류와 종교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둔황을 경유지로 하는 동서교류가 확대하며 불교는 이 지역으로, 그리고 중국 내륙으로 전파되었다.
둔황 석굴은 초기에는 인도의 석굴을 모방하여 조성되었고 초기 둔황 벽화는 인도와 중앙아시아 미술 형식을 흡수했다. 당나라 시기(618-907)에 이르면 점차 중국적 화풍으로 자리를 잡으며 둔황 벽화는 예술적 발전의 절정에 도달했다. 그러나 서기 6~8세기 아랍의 침략으로 실크로드가 폐쇄되며 둔황의 예술은 20세기 초 유럽인들이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중국 화가들의 예술적 비전에서 사라졌다.
20세기 초 중국 문화 유물과 예술적 가치를 감지한 서구의 탐험가와 고고학자들은 신장 등 중국 서부 지역에 들어와 문화재를 발굴했다. 그들 중 영국의 고고학자 스타인(1862-1943)은 둔황 막고굴 제 17굴 장경동에서 발굴된 수천 개의 종교 문서와 그림 등, 수많은 유물 상당수를 1907년에 영국으로 가져갔다. 1908년에는 프랑스의 중국학자 폴 펠리오(1878~1945)도 프랑스 원정대를 이끌고 둔황 장경동 불교 유물을 획득하여 파리로 가져가 전시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중국의 지식인들과 고고학 및 예술계는 강한 우려와 함께 저항하였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사회 전체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둔황이 재발견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중일전쟁은 중국인에게 민족의식을 싹트게 하였고 중국의 화가들은 민족적 미술 형식을 모색하였다. 화가들에게 둔황은 민족적 미술의 보고로 여겨졌다. 그들은 둔황의 석굴사원에 있는 불교 벽화를 직접보고 모사하고자 둔황으로 향했다. 둔황을 찾은 중국 화가 중에는 조선족 화가 한락연도 있었다. 독실한 불자인 중국 화가 장다첸이나 리딩룽은 신앙적 자세로 둔황 막고굴의 불교 벽화를 모사하였겠지만 모든 화가가 신앙적 차원에서 벽화를 모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모사하는 과정에서 둔황 석굴 사원의 불교 벽화는 그들의 영혼을 움직였고 창작에 관한 영감을 주었다.
둔황 불교 벽화를 모사한 화가들
리딩룽은 둔황 석굴사원의 불교 벽화를 모사하기 위해 둔황에 최초로 도착한 화가이다. 그는 3명의 여성과 10명의 남성으로 구성된 "둔황 원정대"를 결성하여 1938년 겨울에 출발했다. 그들은 당나라 현장스님이 불교를 배우기 위해 떠난 서역 순례길을 따라 둔황에 도착했다. 중국의 유명한 화가 장다첸도 리딩룽이 그린 둔황의 불교 벽화 모사도에 감탄하여 둔황에 가기로 하였다. 장다첸은 아들 장신지와 사위 샤오젠추 등, 온 가족을 이끌고 1941년 3월 둔황에 도착했다. 그는 세월에 의해 훼손된 벽화의 원형을 그리기 위해 불화 전문 화승과 함께 원형을 추적하며 복원 모사를 했다. 독실한 불자인 화가 관산웨도 1943년 아내와 함께 둔황 막고굴에 도착하여 불교 벽화를 모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마카오의 푸지선원에서 스승과 함께 머무르며 불교미술에 관한 예술적 경험을 나누고 신행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둔황의 석굴사원 벽화를 마주하는 감회가 깊었다. 그의 스승 가오젠푸는 “너는 훌륭한 창작을 위해 불교 예술에서 배우라.”는 가르침에 따라 불교 벽화를 열정적으로 모사했다. 이들 화가들 이외에도 창수홍, 둥시원, 우주오렌 등 당대의 중국 화단을 대표하는 화가들이 둔황석굴 사원으로 달려가 벽화를 마주했다. 20세기 중반, 중국의 화가들은 왜 둔황의 불교 벽화를 그리려 하였을까?
20세기 중반, 둔황에 도착한 화가들은 둔황의 불교 벽화는 밝은 색상과 화려한 배색, 다양한 내용들로 구성된 화면을 보며 서양화와 달리 마음을 움직이는 미묘함을 느꼈다. 이렇게 둔황의 불교 벽화는 서양미술 교육을 받은 화가와 전통 문인 화가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둔황의 불교 벽화는 새로운 표현 형식을 찾던 중국 화가에게 영감을 주며 창작의 원천을 제공했다. 당시 화가들이 둔황의 불교벽화를 모사하며 받았던 감흥을 자신의 창작 작업으로 승화시켰다.
종교화는 종교의 교의를 전달하는 매개이어서 기본적으로 관객을 대상화한다. 불교회화도 불교의 교리를 시각적으로 전하는 목적에서 제작되었으므로 그림 앞에서 관객이 대상이 될 수 있게 특정한 형식 체계를 이루고 있다. 둔황의 불교 벽화도 당연히 이러한 형식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20세기 중반 중국 화가들이 둔황의 불교 벽화를 민족적 미 형식으로 여기며 이를 모사하기 위해 둔황에 도착하였지만, 모사를 위해 벽화를 바라보자 오히려 그들은 대상이 되어 벽화가 던지는 강렬한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강렬한 메시지를 마주한 그들은 불교 벽화의 강렬한 메시지 전달력의 원천을 파악하기 위해 불교 벽화의 조형적 실체를 분석하고, 이를 모사도에 적용하며, 자신의 창작 작업에 변용하기도 하였다. 중일전쟁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당시 화가들은 민족적 미 형식을 추구하기 위해 둔황 석굴 사원의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갔지만, 종교적 메시지를 강렬하게 보내는 불교 벽화에 내재한 조형 언어는 천년의 시간을 초월해 그들의 영혼에 감흥을 주었고 이로부터 얻은 영감은 창작의 새로운 동력이 되어 주었다.
조선족 화가 한락연이 그린 키질석굴사원의 비천상 벽화 모사도, 유화, 1946년
박경귀 (불교조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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