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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에서 선의를 늘리는 일
한 시인이 보내온 시집을 펼쳐 읽다보니 다음의 문장이 있었다.
“세 바퀴 자동차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구포국민학교 정문 앞의 문화슈퍼입니다. 나는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하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런 장식 없는 나만의 귀한 추억입니다.”
이 문장들에서 특히 “아무런 장식 없는”이라는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기억하는 나만의 추억 가운데 아무런 장식이 없는 추억은 어떤 것이 있을까. 누에를 먹일 뽕잎을 따서 집으로 돌아가는 한 소년의 머리 위로 여름 소나기가 내리는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한 소년은 아마도 열 살 무렵의 나일 텐데, 왜 이 장면이 떠올랐을지는 나도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장면은 어떤 선의(善意)가 느껴지는 순수하고 맑은 장면임에는 틀림이 없다. 누에를 먹이기 위해 뽕나무에 가서 뽕잎을 따는 것 자체가 착하고 귀한 마음일 것이요, 또 여름 소나기의 투명한 빗방울은 깨끗한 자연 그 자체일 것이다. 비록 옷과 몸은 소낙비에 젖지만, 시골의 자연에서 맞는 소낙비는 적어도 시골 사람들은 좀 맞아도 좋다고 여겨 굳이 피하려 하지 않기도 한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시골집에 있으면서 하는 일은 거의 전부가 농사일이다. 그리고 가만히 돌아보면 농사일은 선의로 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 아침에는 아침밥을 먹기 전에 토마토와 오이의 순들을 지지대에 묶어주었다. 토마토와 오이의 순들은 지지대를 따라 덩굴이 올라가기 때문에 묶어주지 않으면 자라지 못하게 된다. 토마토도 오이도 덩굴이 올라가고 꽃이 피더니 이내 열매가 달렸다. 오이는 매일 따서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거둬들이는 양이 많고, 토마토는 이제 열매가 굵어지고 있어서 익으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순들을 지지대에 묶어주고 풀을 뽑고 호미로 북을 높게 돋우어주었다. 그리고 물조리개로 물을 주었다.
아침을 먹은 후에는 정원에 가서 국화와 산앵두 등의 화분에 물을 주었고, 긴 호스를 끌고 와 수국과 해바라기, 작약, 낮달맞이꽃 등에 물을 주었다. 가뭄이 계속되어서 이틀에 한 차례는 물을 듬뿍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국은 피기 시작했고, 절에서 씨를 얻어와 심은 해바라기도 이제 제법 자라 하나 둘씩 두상화(頭狀花)가 피고 있다. 해바라기의 그 원반 같은 두상화는 여름 내내 노랗게 피어 있을 것이다.
점심을 먹기 전에는 텃밭에 가서 풀을 뽑았다. 풀을 뽑다 동백나무 그늘에 앉아 잠깐씩 땀을 식힐 때에 바람이 불어주었다.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와주니 고맙고 고마운 일이었다.
아침밥을 먹기 전부터 계속 몸을 움직이기 때문에 점심을 먹은 후에는 잠깐씩 오수를 즐긴다. 이 일은 시골 생활이 주는 선물 같은 것이다. 꿀과도 같은 달콤한 낮잠을 잠깐 즐기고 또 마당과 밭으로 간다. 물론 강아지에게 밥을 주는 일도 잊지 않는다. 빨래를 널기도 하고, 마당의 잡초를 뽑기도 한다. 비질을 하기도 한다. 밭으로 가서는 풀을 뽑는다. 여름 내내 밭일의 대부분은 풀을 뽑는 일이다. 제초제를 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날 때마다 풀을 뽑는다. 특히 귤나무가 심겨져 있는 밭은 신경이 더 간다. 작년에 처음으로 내가 농사를 지어서 귤을 땄다. 귤꽃이 피는 것을 보고 졸시 ‘귤꽃이 피는 동안’을 짓기도 했으니 그 또한 수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의 내용은 이러하다.
“귤밭에/ 소금 같은 귤꽃이 피어/ 향기를 나눠주네// 돌에게/ 새에게/ 무쇠솥 같은 낮에게/ 밤하늘에/ 그리고/ 내 일기(日記) 위에// 귤꽃 향기를/ 마당 빨랫줄에 하얀 천으로 널고/ 귤꽃 향기를/ 홑겹 이불로 덮고/ 요로 깔고// 귤꽃 향기처럼/ 나는/ 무엇에든/ 조용하게 은은하게/ 일어나고”
귤나무로부터 조용하게 은은하게 일어나 번져오는 귤꽃 향기를 맡으며 지내는 동안에는 내 마음에도 급격하게 요동치는 것들이 좀 잦아들고 줄어드는 느낌이다. 마음속에도 꽃의 좋은 냄새가 가득한 것만 같다. 저녁에는 내가 거둬들인 것을 이웃과 지인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상추며 방풍나물이며 오이를 나눠준다. 물론 이웃과 지인도 내게 여러 가지를 나눠준다. 얼마 전에는 농약을 치지 않고 기른 것이라며 열무를 나눠주었다. 저녁이 되면 밥그릇을 들고 툇마루에 앉아 텃밭에서 기른 것을 된장과 함께 해 밥을 먹는다.
한분순 시인의 시 ‘조용히 아름다운’ 가운데 이러한 시구가 있다. “화분마다 열려 있는/ 꽃들의 환한 일상// 호의와 밀담들이/ 말없이 가득해서// 곁으로 휘파람 불면,/ 화답하는 향긋함”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하는 내 일은 꽃들의 호의와 향긋함의 화답을 받는 일에 견줄 수 있을 것 같다. 풀을 뽑고 북을 돋우고 순들을 지지대에 묶어주고 꽃 피고 열매 맺는 일을 도와주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이지만, 이 일로 인해 생긴 좋은 결과와 결실은 다시 내가 받는다. 꽃의 향기와 열매의 달콤함 등은 내가 받는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의 일상이 이러하니 험담을 하거나 화를 내거나 걱정거리가 더 커질 이유가 없다. 차분하고 부드럽고 착한 마음만 있다. 돌보는 마음만 있다. 그러므로 자연 속에서 선의를 늘리는 일만이 있다. 할수록 이로운 일이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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