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뉴스
조계사보 칼럼
아주 짧은 법문
“길을 묻는 자에게 올바르게 길을 일러주고, 목마른 자에게는 정성껏 물을 주며, 언제 어디서나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한 희생과 배려와 자비의 정신으로 자신을 다듬어 가는 길이 ‘기도’고 ‘도’로 가는 길이요…. 기도와 도를 산에서만 닦는 것이 아니요.”
한창 등산을 다닐 때의 일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는 전국에 백운산이 다섯 개가 있는데 광양의 백운산(1,218m)이 전남에서 지리산 다음 높은 산으로 백운산에는 하백운암과 상백운암 두 암자가 있는데 상백운암의 스님이 등산객에게 해주는 말을 옆에서 들은 것을 후에 불교에 입문하고서야 그 내용이 법문이란 것을 알았다. 몇 번이나 사경을 헤매고 건강회복 차원에서 시작한 등산이 나를 천주교에서 불교로 전환시켰다. 등산을 시작한 1970년도만 해도 등산이 흥행하지 않던 때라 지인들을 만나면 ‘또 놀러가요?’할 때마다 나는 마음속 아픔의 비애를 삭히며 부드러운 웃음으로 그들을 대했다. 남들이 볼 때는 놀러만 다니는 것으로 보였겠지만 절대적으로 그것은 아니었다. 음식을 잘 못 먹어 배고프고 힘이 없어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걷다 보면 언제나 혼자였다. 산을 타는 이들은 언제나 외로운 길을 간다. 누구를 도와줄 수도 없고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자기와의 싸움이기에 각자 가다 보면 앞에 가고 뒤에 오고, 그래서 외로운 길을 가는 것이다.
그렇게 산길을 걸으면서 자연을 벗삼고 그 가운데서 인생을 배우고 인생을 노래했다.
“삼라만상의 순리 속에 춘하추동 사계절을 몸소 부딪히고 체험하며 스스로 자연의 진리를 터득했고, 기쁜 일이 있다고 기뻐만 말고 슬픈 일이 있다고 슬퍼만 말고, 어떠한 즐거움도 괴로움도 견디기 힘든 어려운 일도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길과 그 길을 갈 수 있는 인내심과 강인한 정신력을 얻음으로써 어떠한 산길이라도 걸을 수 있었다.”
법납도 법명도 모르는 상백운암 스님의 그 법문을 내 인생의 지표로 삼고 건강을 위하여 열심히 등산을 다녔다. 산행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면 힘들어 지친 심신을 맞이해주는 것은 사찰이었다. 대사찰부터 조그만 암자까지 다정하게 포근하게 안아주며 위로해주며 적막하면서도 오묘함과 드러나지 않은 숨은 그 어떤 화려함에 매료되며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마침 개인전은 아니지만 합동 서예 전시회에 반야심경 병풍10폭을 출품작으로 쓰는 과정에서 산행을 하면서 느꼈던 모든 감정들이 불교와 상통한다는 것을 느낀 감정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내마음을 안 불자인 동료회원이 교재까지 선물로 사주며 ‘능인선원’을 소개해 능인선원 불교대학 26기(1988년)를 수료하고 해인사를 찾았다.
서울에서 해인사를 가려면 하루가 다 갔다. 그래도 해인사에 열심히 다니던 중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를 알게 되었다. 본적이 서울인 내가 왜 몰랐던가? 생각해보니 불자가 아니여서 무심코 ‘절이구나’ 그냥 지나치고 조계사에 다니는 지인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누가 끌어주는 이도 밀어주는 이도 없는 조계사를 처음 찾았을 때 산속에 있는 절만 보다가 서울 중심에 있는 조계사를 보니 낯설고 산만해 보였지만 용기를 내어 과감하게 2000년도에 발을 디디고 기본교육 32기를 수료하고 이내 각 경전반(반야심경·천수경·금강경)을 거쳐 불교대학과 불교대학원을 수료하고 사중에서 좋다는 교육은 물론 타사찰에서도 좋다고 하는 교육과 큰스님들의 법문을 찾아다니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픔은 사라지고 건강을 되찾았다.
불교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 불교에는 세 가지 보시가 있는데 그중 울력 보시가 제일이라고 배웠기에 늦은 불교입문이라 전력을 다해 불법을 공부하며 울력을 해왔다. 왜냐하면 ‘병들어 누워 있으면 아무짝에도 못 쓸 육신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일을 한다는 것은 생명체가 살아 있다는 것. 일을 하면 새로운 활력소가 생긴다는 것. 불자로서 조계사 신도로서 주어진 일을 책임 있게 완수하는 것이 해답이었다. 인연 있는 사찰에 울력할 일이 생기면 어디든지 무슨 일이든지 가리지 않고 다녔다.
가장 보람 있던 때는 시다림 봉사 7년과 지금은 원적에 드셨지만 태공당 월주 대종사 스님과 지구촌공생회 우물투어로 캄보디아에 봉사요원으로 갔던 때이다. 오지였던 마을에 우물파기와 주민위생교육, 유치원 개원, 초등학교 개교식에서 봉사하던 일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고 행복이였다. 그 뉴스가 세계적으로 보도되며 캐나다에 사는 사촌 남동생이 천주교신자인데 그 뉴스를 보고 한국으로 전화가 왔었다. 그렇게 봉사하면서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약봉지는 물론 병원에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자비였다.
아침이면 매일 조계사 가는 일이 행복이고 보람이다. 화요일이면 노래 부르는 것이 기쁨이 되었다. 우리 회화나무 합창단이 창단된 지도 16년에 접어든다. 특징이 있다면 나이 많고 회원수가 많은 것, 모두 지덕과 불심을 갖추신 어르신들이다. 코로나19로 한동안 모든 것이 중단된 상태라 합창연습을 못해서 안타까운 마음이었으나 최근 다시 노래 부를 수 있게 되어 새생명을 얻은 듯하다. 코로나 시기에는 월에 한 번이지만 지하철 역에 ‘풍경소리’ 포스터 교체 울력과 후원 공양간에 설거지 봉사가 있어 감사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가피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열심히 불법을 배우고 정진하며 고종명(考終命)을 맞이하는 그날까지 울력 보시할 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글을 가름한다.
류영주 (전법심, 회화나무합창단 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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