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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꼬리도 과분해요
삽화 | 견동한
아주 오랜 옛날 인도 땅에서는 하늘의 신에게 지극한 정성을 보이려고 성스러운 불을 피우고 잘 지키는 풍습이 있었지요. 그 불을 성스러운 불(聖火)이라 부르며 그 속에 공양물을 던져 넣으면 연기가 위로 올라갈 것이요, 그러면 공양 올리는 사람의 정성이 하늘의 신에게 닿을 것이란 믿음이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과거 전생 어느 때 일입니다. 갠지스강 유역 바라나시에서 아주 부유한 집안에 부처님이 태어났지요. 그때는 부처가 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보살이라고 경전에서는 부르고 있습니다.
명망 있는 귀한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자 부모는 아이가 태어난 날에 성화를 지폈습니다. 그리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 보살피고 지키다가 보살이 16살이 되자 말했습니다.
“아들아, 네가 태어난 날에 우리는 성화를 밝혔고 지금까지 꺼지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 지켰다. 이제 너는 어떻게 살고 싶으냐? 우리처럼 세상에서 결혼을 하고 귀족 집안에 걸맞은 인생을 살고 싶다면 신을 찬양하는 성전(베다)을 열심히 배워라. 우리 계급은 신을 섬기고 신의 메시지를 읽는 임무를 갖고 태어났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만일 네가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신의 은총을 바라는 일보다는 신의 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한다면 이 성화를 가지고 숲속으로 들어가거라. 숲에서 이 불을 섬기고 때때로 공양을 올리면서 신에게 네 소망을 전한다면 너는 신의 나라에 태어날 것이다.”
아들(보살)이 말했습니다.
“저는 세속에서 보통 사람들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다. 숲에 들어가 불을 섬기며 신의 축복을 빌면서 훗날 신의 나라에 태어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들은 성화를 밝혀 들고서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조그만 암자를 짓고 불을 섬기면서 숲속 생활을 시작했지요.
숲속 수행자가 된 그에게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소 한 마리를 공양 올렸습니다. 소를 몰고 암자로 돌아온 수행자는 살아 있는 소를 통째로 불의 신에게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소를 잡아서 고기를 저며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차! 싶었습니다.
‘소금이 없네. 소금을 뿌려서 고기를 올리지 않으면 신께서 이 공양물을 받지 않으실 지도 몰라. 그러니 얼른 마을에 내려가서 소금을 얻어 오자. 이왕이면 제대로 맛을 갖춰서 불의 신께 공양 올리는 것이 낫겠지.’
그는 소를 암자 밖에 붙들어 매 놓은 뒤 부지런히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때마침 사냥꾼 무리가 암자 근처를 지나게 됐습니다. 그들은 텅 빈 암자 밖에 묶여 있는 소를 발견했습니다.
“이게 웬 횡재인가! 그러잖아도 출출하던 참인데 마침 소 주인도 안 보이니 우리 얼른 이 녀석을 잡아먹기로 하세.”
사냥꾼들은 그 자리에서 소를 잡아서 살점을 저며 구워 먹었습니다. 고기 양이 어찌나 많은지 배불리 먹고도 고기가 남자 그들은 남은 고기를 다 챙겼습니다. 그리고 느긋하게 암자를 떠났지요.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소꼬리와 네 발, 그리고 소가죽만 남았습니다.
마을에서 소금을 구해 온 남자가 도착했을 때는 살아 있는 소는 이미 사라졌고 소를 도살한 흔적과 사냥꾼들이 못 먹고 버리고 간 것만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습니다.
숲 속 암자에서 성화를 지키며 신의 축복을 빌면서 수행해오던 남자는 망연자실하여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세상에나! 이 꼴 좀 봐.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처음에는 주인이 없는 틈을 타서 남의 소를 함부로 잡아먹은 자들에게 분노가 솟아올랐지만 이내 그의 분노는 암자에서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성화를 향했습니다.
“이 불의 신은 자기 것도 지키지 못하는 구나. 자기에게 공양 올리려고 내가 정성을 다해 준비했는데 저리도 속수무책 남이 가져가버리는 걸 바라만 보고 있었단 말이다. 제 것도 못 지키면서 어떻게 나를 지켜줄 수 있을까. 이렇게 무능한 불의 신에게 내가 지금까지 무슨 헛짓을 했단 말인가. 백날 천 날 공양을 올려도 내게는 아무런 이익이 오지 않겠구나.”
남자는 성화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이보시오. 불의 신이여. 자기 것도 지키지 못 하면서 어떻게 다른 이를 지켜줄 수 있겠소. 자, 여기 소꼬리는 남았으니 이거라도 드시오. 그대에게 정성 다해 올리려 했던 소고기는 이미 사라져 버렸으니 어쩌겠소. 이 꼬리로라도 만족하시오.”
그는 소 꼬리 등등의 부속물을 불에 던져 넣고 시를 읊었습니다.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불의 신이여.
그대에게 소꼬리를 공양하려고 하오.
살코기가 어울렸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내게 살코기는 없소.
그대는 이 소꼬리나 드시고 꺼지시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수행자(보살)는 물을 가져와 불에 끼얹었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빌며 온종일 지극정성으로 섬기고 기도를 올렸던 불을 끈 뒤에 그는 암자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계를 잘 지키고 자기 마음을 세심하게 살피면서 선정을 닦으며 수행자로서의 삶을 완성했지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불을 꺼버린 수행자가 바로 나였다.”
(본생경 144번째 이야기)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인생이 아무리 고행길이라 해도 행복하기 위해 평생을 애쓰며 살아가고 있지요. 그리고 보통의 인간을 넘어선 위대한 존재에게 자신의 행복을 비는 일도 많이 합니다. 건강을 빌고 장수를 빌고 대학진학과 취업을 빌고 멋진 배우자 만나기를 빌고 자식 낳기를 빌고…. 좋은 대학에 가기를 빌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으면, 그 다음에는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를 빌고, 그래서 좋은 직장에 들어갔으면, 그 다음에는 좋은 배우자 만나기를 빌고, 그래서 원하던 이상형을 만나 결혼했으면, 그 다음에는 자식을 낳고, 그 아이가 잘 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정성을 들여서 원하는 일을 이루면 기도의 영험이 있다거나, 신이 또는 불보살님이 응답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나와 내 가족을 지켜달라고 신 또는 절대자, 전지전능한 존재에게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내 가족의 안위와 행복을 절대자에게 비는 걸 뭐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전생이야기를 통해 이렇게 당신의 생각을 내비칩니다. 자기 행복도 못 지키는 존재에게 대체 무엇을 빈다는 것인가! 라고 말이지요. 이 말은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는 그 존재가 ‘정말’ 전지전능하고 유능한가를 한번 생각해보라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간절한 소망이 있을 때 ‘엎드려 기도하고 정성을 다하면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한번쯤은 빌고 또 빌던 간절한 마음을 멈추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간절히 내 소망을 들어달라고 머리를 조아리는 그 존재는 어떤 분인가 하고 말이지요. 부처님의 이 전생이야기를 보자니 문득,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그 분에 대해 정작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어떤 남자가 친구들에게 이렇게 자랑하고 있습니다.
“난 지금 사랑에 빠졌어. 아, 너무 멋진 여자를 만났거든.”
그러자 친구들이 부러워하면서 물었지요.
“정말이야? 그렇게 멋진 여자란 말이야? 드디어 네가 사랑을 하게 됐구나. 축하해.”
축하 인사를 건넨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그 여자가 궁금해졌지요.
“어디 사는 여성이야?”
사랑에 빠졌다던 남자가 대답했습니다.
“어디 사는지 몰라.”
“그럼 어느 도시에 살고 있는데? 그건 알겠지?”
“아, 난 그것도 모르겠는걸.”
친구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또 물었지요.
“이봐, 네가 사랑한다는 그 여자에 관해서 묻고 있잖아. 어디 사는지도, 어느 도시에 사는지도 모른다면 혹시 그 여자 이름은 알고 있어? 부모님은 계셔?”
“몰라.”
남자는 도리질했습니다. 친구들이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직장에 다니고 있어? 어느 회사야? 어떤 일을 해?”
“모르겠는 걸….”
친구들이 답답하다며 다시 물었습니다.
“이봐, 친구! 대체 어떤 여자를 좋아한다는 거야? 그 여자 생김새는 어때? 키는 커? 체격은 어때? 얼굴은 어떻게 생겼어?”
“아, 몰라. 난 몰라.”
남자는 그 여자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어안이 벙벙해 있자 그가 강변했지요.
“난 그 여자에 대해 하나도 몰라. 하지만 난 사랑에 빠졌단 말야. 난 정말 그 여자를 좋아해.”
(본생경 151번째 이야기)
전지전능한 절대자를 믿는다면서 우리의 행불행도 그 분이 주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이 들려주시는 사랑에 빠진 남자 비유입니다. 사랑한다면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이 남자-. 정말 사랑하기는 하는 걸까요? 아니, 그 남자가 사랑한다는 여인이 진짜 있기는 있는 건가요?
뭔지도 모를 무엇인가를 향해 행복을 비는데, 정작 숭배를 받는 그 존재는 자기 것도 지키지 못해 소꼬리도 과분하다고 본생경에서는 말합니다. 그 이야기에서 부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불을 꺼버린 수행자’라고 했습니다. 바깥의 어떤 대상을 향해 숭배하는 마음으로 지핀 불, 나의 행복을 지켜달라며 한없이 머리를 조아렸던 불, 인생에서 만날지도 모를 불행을 피하게 해달라며 간절히 바라며 치성을 드렸던 불. 바로 그런 불에 물을 끼얹어 꺼버린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것이지요. 바깥의 애매모호한 대상을 향해 행복을 빌지 않고 스스로가 자기 마음을 잘 살피고 수행을 하면서 자기 인생을 완성해가는 것만이 가장 확실한 구원이라는 것, 그리고 바로 이것이 종교요 신앙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미령 (경전 이야기꾼, 불교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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