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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알아두면 쓸데있는 불교 공부

거꾸로 매달린 고통에서 벗어나는 우란분절

  • 입력 2022.07.28

반야용선


8월의 따가운 햇살 아래 오곡이 영글어 가고, 백과에 단맛이 드는 계절이 왔다. 이맘때가 되면 농부들은 땀 흘린 대가로 첫 수확의 기쁨을 누리고, 여름 한 철 화두와 씨름하던 수행자들은 화두를 내려놓고 만행을 떠나는 계절이다. 전자는 농경문화의 풍경이고, 후자는 종교문화의 전통인데 서로 다른 이 두 전통이 하나로 만나는 지점이 바로 우란분절이다.

 

 

목련존자의 신통력과 효심

우란분절은 목련존자의 효심을 다룬 『우란분경』에 근거를 두고 있는 불교명절이다.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 목련존자는 열심히 정진하여 여섯 가지 신통력을 얻

 

 

 

었다. 효심이 깊었던 존자는 가장 먼저 부모님의 은혜를 갚고자 어머니가 계신 곳을 찾았다. 천안통(天眼通)으로 두루 살펴보던 존자는 아귀도에 떨어져 피골이 상접한 어머니를 발견했다. 존자는 눈물을 흘리며 발우에 음식을 가득 담아 어머니께 갔다 드렸다. 어머니는 음식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움켜쥐었지만 채 입에 닿기도 전에 음식은 불덩이가 되고 말았다.

신통력으로도 아귀도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제할 수 없음을 깨달은 존자는 부처님께 달려가 어머니를 구제할 방법에 대해 여쭈었다. 부처님은 존자의 어머니는 죄가 깊어 신통력으로도 구제할 수 없다고 하셨다. 반드시 여러 스님들의 위신력에 의지해야만 구제할 수 있다며 그 방법을 일러 주셨다. 즉 많은 스님들이 하안거를 마치고 자자(自恣)를 행하는 음력 7월 보름날 밥과 다섯 가지 과일을 비롯해 ‘백 가지 맛이 나는 음식[百味]’을 준비하여 수행을 끝낸 대덕 스님들께 공양 올리라고 하셨다.

이날은 여러 성현(聖賢)들이 비구의 모습으로 대중들과 함께 계시면서 공양을 받는다고 하셨다. 청정한 계(戒)와 성현들의 도(道)가 구족한 이 날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면 그 공덕이 한량없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하안거를 끝내고 자자하는 승가에게 정성을 다해 공양하면 7대의 부모와 육종(六種)의 친족들이 삼악도(三惡道)의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에 목련존자는 안거를 끝내고 자자를 위해 모인 스님들께 갖가지 음식을 마련하여 공양을 올렸다. 존자의 어머니는 아들이 베푼 이런 공덕으로 1겁 동안 받아야 할 아귀도의 고통에서 벗어나 안락을 얻게 되었다.

 

 

거꾸로 매달린 고통을 해소하는 날

우란분절은 불교의 4대 명절 가운데 하나로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우란분경』에 따라 하안거 수행이 끝나는 해제일에 맞춰 조상 천도재를 올린다. 이날은 전통적으로 ‘우란분절(盂蘭盆節)’, ‘백중(白衆)’, ‘백종(百種)’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들 이름에 담긴 뜻을 살펴보면 우란분절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다.

첫째는 우란분절이다. ‘우란분(于蘭盆)’이란 범어 ‘울람바나(ullambana)’를 음사한 것으로 ‘도현(倒懸)’ 또는 ‘도수(倒垂)’로 번역된다. 우리말로 풀면 ‘거꾸로 매달다’, ‘거꾸로 매달리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란분은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은 고통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란분경』에서는 갖가지 음식을 준비하여 안거가 끝나는 날 스님들께 공양하면 삼악도에 떨어져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은 고통에 시달리는 선망부모와 조상들을 구제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우란분은 ‘구도현(救到懸)’, 즉 거꾸로 매달린 듯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중생을 구제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근거로 우란분절은 조상을 천도하는 날이 되었고, 효사상의 비중이 큰 동북아에서는 예로부터 우란분절이 중요한 불교의례로 행해져 왔다.

둘째는 백종(百種)이다. 밥과 다섯 가지 과일을 비롯해 ‘백가지 맛을 내는 음식[百味]’을 준비하여 스님들을 공양하라는 『우란분경』의 내용에서 유래된 말이다. 음력 7월 보름이 되면 햇과일과 채소가 풍성해 지고, 올벼는 첫 수확을 할 만큼 영글게 된다. 풍성해진 오곡백과를 수확하여 수행을 마친 스님들께 공양 올리고, 그 공덕으로 조상을 천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백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재를 베풀고 조상을 천도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 백종이다. 백종이란 이맘때가 되면 백 가지 음식을 마련할 수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백이라는 숫자 자체 보다 갖가지 음식을 준비하라는 뜻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셋째는 백중(白衆)이다. 여름 석 달 동안 열심히 수행한 스님들이 하안거 해제를 맞아서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으면 스승에게 묻고, 수행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으면 대중에게 고하는 것이 ‘백중(白衆)’이다. 『우란분경』에서는 열심히 정진한 스님들의 수행 공덕의 힘을 빌려야만 조상을 천도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란분절은 열심히 수행한 스님들께 공양 올리는 날인 동시에 스님들의 수행공덕이 중생구제를 위해 회향되는 날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여 조상을 천도하겠다는 자손들의 효심과 열심히 수행한 스님들의 수행공덕이 만날 때 비로소 참다운 조상천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란분절에 담긴 사회적 의미

그런데 우란분절은 이상과 같은 종교적 의미에만 국한되지 않고 민족문화의 일부로 행해져 오기도 했다. 조상천도와 승가 공양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넘어 갖가지 세시풍속으로 행해지면서 민중들의 삶 속으로 체화되어 온 것이다.

우란분절을 달리 ‘백종(白踵)’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종교적 의미가 현세적 의미로 확장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종(踵)’이란 발뒤꿈치를 뜻하는데 음력 7월 보름을 지나면 더 이상 논밭에 들어가 김을 맬 필요가 없다. 따라서 농부나 노비들도 발을 깨끗이 씻고 쉰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우란분절이 되면 민가에서는 ‘호미씻이’와 같은 세시풍속이 행해졌다. 김맬 일이 사라졌음으로 호미를 깨끗이 씻어 정리해 두는 것이다.

연장을 정리했으니 그 연장의 주인공도 휴식을 취하게 된다. 그래서 백중을 달리 ‘머슴날’이라고도 했다. 뜨거운 여름 동안 고생한 머슴에게 용돈을 주고 자유롭게 놀게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백중장에 가서 한여름 동안 고생한 노동에서 벗어나 마음껏 자유를 누렸다. 마을 공터에는 농악과 놀이판이 벌어지고, 머슴들은 그 장단에 맞춰 신명 나게 춤추며 놀았다. 수행공덕이 거꾸로 매달린 지옥 중생들의 고통을 구제한다면 수확의 풍요는 고된 노동으로부터 머슴들을 해방시켰던 것이다. 지옥의 고통에서 망자를 벗어나게 한다는 종교적 의미는 현실적 고통에서 벗어나는 축제로 확장되는 모습이다.

본래 우란분절은 고통 받는 망자의 영혼을 구제하는 날이었지만 거꾸로 매달린 고통을 해소한다는 메시지는 현세의 삶에도 투영될 수밖에 없다. 엄밀히 보면 중생의 삶은 거꾸로 매달린 고통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우리들의 삶은 스스로 주인공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갖가지 물신(物神)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주객이 전도되어 인간들은 오히려 물질의 노예가 되어 허덕이고 있기에 중생의 삶 자체가 ‘거꾸로 매달린 고통’의 연속인 셈이다.

이처럼 사람들이 물질적 욕망에 의해 속박 당하는 것을 두고 장자(莊子)는 ‘물역(物役)’이라고 했다. 사람이 ‘물질의 부림’ 받고 산다는 뜻이다. 그런 물역에 시달리며 물질을 숭배하는 것을 삶이라고 집착하는 것이 거꾸로 매달린 중생들의 고통이다. 그런 점에서 거꾸로 매달린 고통이란 단지 지옥에 빠진 중생들의 고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구나 뒤바뀐 생각, 왜곡된 생각으로 허구를 실재라고 믿고 살아가면 거꾸로 매달린 고통은 나의 고통이 된다. 불교를 공부하고, 참다운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것은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잘못 알고 있는 무명(無明)과 전도된 몽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거꾸로 매달린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란분절은 우리민족의 세시풍속과 결합되어 사회적 긴장을 풀고 고된 삶을 한 템포 쉬어가게 하는 기능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는 그와 같은 사회적 역할과 의미는 사라지고 종교적 의례만으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우란분절의 다양한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삶에 지친 이들은 고된 노동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하고, 가진 사람은 그런 이웃을 위해 자비를 베풀고, 조상의 천도를 바라는 효심으로 수행자들에게 공양하는 문화가 되살아나야 한다. 그것이 거꾸로 매달린 고통을 해소하는 구도현의 의미를 바르게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부처님께서는 목련존자에게 수행을 마친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고, 그 분들의 수행공덕이 있어야만 조상이 천도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전통이 희박해진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므로 이를 되살리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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