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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복더위를 머리에 이고 살 때에는
여름날의 으뜸은 강렬한 햇빛일 테다. 빨래를 해서 빨랫줄에 널어놓아도 금방 빨래가 마르고, 잠시 쏟아졌다 그치는 소낙비로는 차마 태양의 열기를 낮출 수 없다. 매우 사납게 뜨거울 때에는 세상이 하나의 화로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큰 나무가 가꾸어서 우리에게 주는 깊은 그늘에라도 들어가지 않는다면 맹수와 같은 태양의 눈빛을 피할 수 없을 정도이다. 찬물을 몸에 끼얹어도 금방 땀이 또 생겨나고 만다. 날이 뜨거우니 마음도 뜨거워져 어쩔 줄 몰라 하는 형국이다. 그래서 바쁜 마음을 좀 내려놓고 조금은 느슨한 생각으로 지내기도 해야 할 모양이다. 마음을 느슨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여유를 갖고, 조바심을 억누르고,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기다리려고 애쓰는 일은 내면의 성장으로까지 이끌어준다.
최근에 나는 다비드 칼리가 글을 쓰고, 세르주 블로크가 삽화를 그린 그림책 『나는 기다립니다』를 읽었다. 다비드 칼리는 이 책으로 바오밥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나는 기다립니다. 어서 키가 크기를”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기다림의 내용들을 서술한다. 나는 그림책의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잠깐씩 어떤 내용의 기다림이 등장할지 설레며 궁금해 했고, 또 내가 이 그림책에 등장하는 한 명의 주인공이라면 무엇을 기다림의 내용으로, 나의 소원으로 말할지 스스로 자문해보기도 했다. 아마도 나는 내 기다림의 내용에 대해 “나는 기다립니다. 밭에서 자라는 줄무늬 수박이 온통 붉게 익기를.”이라고 말하거나 “나는 기다립니다. 파도가 푸른 돛처럼 밀려오는 해변으로 떠날 여름휴가를.”과 같이 말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 그림책에서 내가 막상 읽은 매우 신선했던 기다림의 내용은 이런 것들이었다. “나는 기다립니다. ‘좋아요.’라는 그 사람의 대답을”이라고 쓴 문장과 “나는 기다립니다. ‘미안해.’라는 한 마디를”이라고 쓴 문장이었다. 이런 기다림의 내용이라면 우리가 무언가를 기다리는 연습을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한 단계 성숙시키고, 또 나의 내면의 성장도 함께 견인해 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 여름날을 살면서 조마조마해하거나 마음을 졸이는 일을 조금은 줄이고, 늦추고, 과욕을 덜 부리고, 기다리며 살아야 할 일이다.
햇살이 강하고 세차므로 단연 물의 서늘함을 찾게도 된다. 계곡에 흐르는 물이나 바다의 해안으로 오는 물은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후련하고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요즘의 여름날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물은 자그마한 시내의 물이고, 그 시내의 물에서 헤엄을 치던 어릴 적의 내가 아마도 그동안 여름날을 살아온 나의 표정 가운데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 시내에서 물장구를 치던 내가 본 것이 조금은 특별한 것이었기에 오랜 동안 또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수경(水鏡)도 없이 물에서 헤엄을 치다 문득 눈을 뜬 순간 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다. 햇살이 물속 아래까지 내려와 그 빛이 하얗고 고운 모래가 깔린 바닥 위에서 어른거리는 것이었는데, 마치 수면에 생긴 물비늘 같았고 또 물속에 생긴 물결 같았다. 그 빛은 은빛으로 반짝였다. 아마도 매우 맑은 시내였기에, 또 가장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세상에 내리는 순간이었기에 그처럼 신비한 풍경을 탄생하게 했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여름날에는 그 맑은 시내와 순수한 동심의 한 아이를 떠올려 보는 것으로서 더위를 잠시 잊기도 한다.
그런데 이 생각을 지금 하고 있자니 얼마 전에 들은 한 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 스님께서는 내게 “어항 속의 물고기라고 여기면서 살아야 해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말씀을 설명하셨는데, 어항 속에 사는 물고기는 바깥을 잘 모르지만, 바깥에서는 이 어항 속 물고기가 훤히 보일 것이니 수행하는 사람은 나의 말과 행실이 하나도 빠짐없이 드러난다고 여겨서 조심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내면을 잘 가꿔야 한다는 말씀일 테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내가 어릴 적 수경도 없이 물속에서 보았던 물의 맑음과 물속으로까지 내려오던 은빛의 햇살이 떠올랐다. 어쩌면 내가 본 것은 시내의 깨끗한 내부였고 그것은 사람으로 치자면 청정한 내면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법했다.
“마음이 청정하면 이것이 곧 자성의 서방정토이다.”라고 『육조단경』에서는 이르고 있다. 청정한 내면의 소유자는 어디에 있더라도 항상 안락할 것이다. 모두 마음에 의지하는 까닭이다.
『벽암록』에도 이런 말씀이 있다. “삼복더위에 문 닫아 걸고 선사는 두툼한 가사를 수하고 계시네. 방 안에 그늘 드리울 소나무, 대나무 한 그루 없고 조용한 산속이나 물가가 아니라도 스님께서 좌선하는 데는 상관이 없네. 마음을 소멸시키면서 불 속에서도 서늘하나니.”
삼복의 더위를 살면서 나는 내 마음의 사용에 대해 다시 점검해본다. 불 같은 태양을 머리에 이고 더위를 몸에 두르거든 차분하고 너그럽고 넉넉한 마음을 갖기를 서원하고, 시내를 만나거든 맑고 깨끗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을 갖기를 서원해보는 것이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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