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서울과 중부지방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속칭 대한민국 1번지로 불리는 강남 일대가 침수됐다. 상가와 지하 주차장이 물에 잠기고, 주인 잃은 자동차들이 도로에 떠다니고, 지하철역이 침수됐다. 반지하에 살던 일가족을 비롯해 지금까지 14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됐다.
우순풍조 민안락과 삼계화택
이번 폭우는 1907년 관측 이래 115년 만에 가장 많은 강우량이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이런 재앙이 되풀이 되고 있다. 중국의 장저우시는 무려 천년 만의 홍수를 기록했고, 미국의 텍사스에서도 천년 만의 폭우를 기록했다. 세계 각국에서는 40도가 넘는 폭염과 가뭄에 시달리는가 하면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하천이 범람하고, 도시가 침수되어 인명피해를 낳고 있다. 저개발국에서나 일어날 법한 자연재해가 제1세계로 불리는 선진국의 유서 깊은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순풍조 민안락(雨順風調民安樂)!’ 조석 예불에서 빠지지 않는 축원이다. ‘비는 순조롭게 내리고, 바람은 잔잔하여 사람들이 안락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돌아보면 삶에서 우순풍조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인간의 삶과 문명은 자연의 질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그 근본이 무너지면 삶과 문명도 위태로워진다. 극심한 가뭄, 50도에 육박하는 폭염과 열돔, 마을을 통째로 쓸어가는 허리케인, 천년 만에 닥친 기록적인 폭우, 오래된 도시를 삼키는 홍수, 영하 50도에 육박하는 한파 등이 모두 자연적 질서의 교란으로 생긴 재앙이다.
이런 재앙들은 표면적으로는 자연재해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기상학자들은 기후변화가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상승하여 초래된 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온 세상이 불타오르고 있다. 북미, 중동, 인도 등 곳곳이 50도에 육박하는 폭염에 시달리고, 호주에서는 무려 6개월 동안 산불이 계속되어 한반도 면적의 83%를 불태웠다.
온 세상이 불길로 변하는 뉴스를 보면서 『법화경』에 나오는 ‘삼계화택(三界火宅)’의 비유를 떠올리게 된다. 중생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불타는 집’이라는 것이다. 작금의 지구는 ‘불난 집’이라는 표현 그대로 불길이 곳곳으로 번져가고 있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로 인해 폭염과 홍수 같은 각종 재앙이 발생하니 이른바 화택지화(火宅之禍), ‘불난 집에 닥친 재앙’이다.
지구가 불타오르는 표면적 이유는 태양에너지 때문이다. 태양에너지가 대기와 해양에 축적되면서 폭염이 닥치고, 그로 인해 가뭄, 식량부족, 질병 같은 재앙이 닥쳐온다. 대기에 축적된 엄청난 양의 에너지는 대부분 바다로 흡수된다. 연구에 따르면 초당 핵폭탄 4개와 맞먹는 에너지가 바다로 흡수된다고 한다. 흡수된 에너지는 해수 온도를 상승시키고, 그로 인해 극지방의 빙하가 녹고, 수증기의 증발이 늘어난다. 그 결과 상상할 수 없는 에너지를 가진 폭풍이 몰아치고,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다. 이 모든 것이 지구가 불타오르면서 닥친 화택지화들이다.
그럼에도 중생들은 그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법화경』에도 “중생들은 불난 집에 있으면서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흥에 겨워 신나게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고 했다. 위기를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벗어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우리 역시 재앙을 목격하면서도 문제의 근원을 해소할 노력은 하지 않고 정쟁에만 매몰되어 있다.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상황을 직시하고 원인을 바르게 진단해야 한다. 그래야만 근본적 해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후위기의 본질은 무엇이고 왜 닥쳐온 것일까? 겉으로 나타난 현상은 태풍, 폭우, 가뭄, 폭염, 한파 등 자연재해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일 뿐 근본적 원인은 아니다. 이런 재앙이 닥친 이유는 지구의 평균기온이 상승했기 때문이고, 평균기온의 상승은 온실가스 때문이다.
온실가스는 자동차의 배기가스를 비롯해 인간의 산업활동 등으로 인해 방출되는 이산화탄소 등이 원인이다. 온실가스가 대기 중에 축적되면 거대한 비닐하우스 같은 역할을 한다. 그로 인해 태양의 복사열이 대기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지구에 축적되면서 기온이 상승한다. 과식하면 토하듯이 에너지를 과하게 흡수한 대기와 해양은 기상이변이라는 형태로 에너지를 다시 방출한다. 이렇게 보면 지구를 불난 집으로 만든 화재의 원인은 바로 인간의 활동임을 알 수 있다. 자연재해로 다가오는 각종 재앙은 사실 인간이 자초한 인재(人災)인 셈이다.
욕망의 불꽃과 방화범
인간은 더 큰 집과 자동차, 더 안락한 생활, 더욱 풍요로운 삶을 추구해 왔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이런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무한히 생산하고, 무한히 소비하면서 화석연료를 연소시켜 왔다. 검은 매연을 내뿜는 공장의 굴뚝은 성장과 풍요를 상징했다. 그 결과 수천 년 동안 280ppm을 유지하던 이산화탄소 농도는 421ppm까지 치솟았다. 이산화탄소의 농도에 비례하여 지구의 평균기온도 같이 상승했다. 지난 100년 동안 지구의 평균기온은 1.1°C나 상승했는데 갖가지 화택지화는 여기서 촉발된 것들이다. 문제는 지구의 평균기온이 1.5°C를 넘어서는 순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재앙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폭우의 원인을 따져보면 기후변화가 있고, 기후변화의 원인을 쫒아가면 온실가스의 축적이 있고, 온실가스의 축적을 추적하면 화석연료 배출이 있고, 그런 업의 원천을 추적하면 인간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재앙의 원천은 인간의 업(業)이며, 그런 업을 짓게 만든 것은 우리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임을 알 수 있다. 강남의 침수도, 세계적인 자연재해도 모두 인간들이 초래한 자업자득(自業自得)인 셈이다. 지구를 불난 집으로 만든 근본은 인간의 욕망이기에 지구를 불난 집으로 만든 방화범도 우리 자신들이다.
기후위기에 대한 대처는 UN과 같은 국제기구나 정부의 몫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후위기는 우리가 자초한 일이기에 우리가 변해야 하고, 모두가 함께 실천해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특히 불자들은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 솔선수범해야 한다. 불교는 불살생과 자비를 제일의 실천윤리로 삼는다. 그런데 기후위기로 인한 모든 재앙은 최종적으로 생명의 위기로 수렴된다. 따라서 불자는 생명살림의 실천을 위해서라도 기후위기 극복에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불교는 업을 통해 세상과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업설(業說)을 믿는 종교이다. 기후위기 역시 악업을 멈추고 선업을 실천하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은 자명하다.
나와 지구를 살리는 소욕지족
이처럼 기후위기는 자연재해도 아니고 신의 심판도 아니고 인간이 초래한 일이다. 원인제공을 인간이 했다면 그 해법도 인간에게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삼계를 불난 집으로 만든 불길의 정체는 욕망의 불꽃이었다. 따라서 그 욕망의 불꽃을 잠재우는 것이 가장 근원적인 해법이 될 것이다. 불교는 수행의 종교인데, 수행은 욕망의 절제로 압축된다.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은 옷 세 벌과 발우 하나[三衣一鉢]만으로 살아가는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비구들은 얻어먹고[乞食], 나무 아래서 생활하며[樹下座], 버려진 천으로 옷을 만들고[糞掃衣], 동물의 배설물을 발효한 약[腐爛藥]에 의지해 살았다. 이를 사의지(四依支)라고 하는데 그 핵심은 소유를 줄이고 최대한 청빈하고 자연적으로 사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중국 선종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달마대사는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네 가지 실천 중에 무소구행(無所求行)을 제시했다. 대사는 ‘구함이 있으면 모든 것이 고통이지만 구함이 없으면 곧바로 극락’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욕망의 대상을 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도의 실천이다. 혜능대사도 소욕지족(少欲知足)을 강조했다. 욕심을 줄이고 만족을 아는 것이 곧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끊임 없이 소유하려 하고, 그런 욕망에 기초한 문명이 지구를 불난 집으로 만들었다. 자기중심적 애착을 내려놓고 무소유의 삶을 사는 것이 소욕지족이다. 그런 삶을 지향할 때 인간의 삶은 더불어 사는 삶이 되고, 뭇 생명의 고향인 지구를 살리는 실천이 될 수 있다.
영가현각 스님은 ‘몸은 가난해도 도는 가난하지 않다[身貧道不貧]’라고 했다. 욕심을 줄이고 소박하게 사는 것이 몸의 가난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청빈한 삶이야말로 도가 높은 삶이라는 것이다. 그런 삶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자기 중심성을 버린 이타적 삶이고, 모든 생명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연기적 삶이고, 욕망의 절제를 통해 생명을 살리는 자비의 삶이다.
생태철학자들도 인류가 직면한 위기의 뿌리는 가치관의 위기, 철학의 위기라고 진단했다. 물질적 소유가 풍요이고, 풍요로움이 곧 행복이라는 왜곡된 가치관이 초래한 위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후위기를 근원적으로 극복하려면 가치관을 전환해야 하고, 생산과 소비 중심의 삶의 양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생태철학자 아느 네스(Arne Naess)는 ‘수단은 소박하되 목표는 위대해야(poor in mean rich in ends)’ 한다고 했다. 집이나 자동차와 같은 삶의 수단은 소박하게 하되, 삶의 이상과 목표는 위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더불어 살 수 있는 삶이 위대한 삶이다. 작금의 상황은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가치관을 바꾸어야 하고, 삶의 양식을 전환해야 한다. 우리 개개인이 소비를 줄이고, 청빈하고 소박한 삶으로 전환할 때 비로소 이 위기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소욕지족은 나를 살리는 수행인 동시에 생명을 구하는 자비행이고, 지구를 구하는 생태적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