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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수업
최근에 나는 깊은 여운을 주는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틱낫한 스님의 메시지를 담은 신간으로 올해 2월에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이번에 우리나라에서도 선보인 책이었다. 책 제목은 『천천히 가라, 숨 쉬며 그리고 웃으며』였다. 올해 1월에 세수 96세, 법랍 80세로 열반한 틱낫한 스님의 말씀에 라샤니 레이의 카드 디자인을 함께 실었다.
이 책의 머리말은 조안 할리팩스가 썼는데 그의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가 천천히 걸을 때 세상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황폐함과 무너짐, 고사리와 꽃이 더 자세히 보인다. 우리는 흔히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서두른다. 자신의 감성이 고통의 몸이나 아름다움의 몸에 닿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 문장부터 내겐 꽤 충격적이었다. 무엇이든 천천히 보행하듯이 마음을 사용해야 대상과 세계가 잘 보일 텐데, 우리는 무엇이든 자꾸 서두른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그것의 이유가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현재에 오래 머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불안함 때문에 벗어나고 회피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 현재에 바로 머물러야 그 대상이 고통의 몸이든 아름다움의 몸이든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된다. 실재를 보게 된다. 동시에 그리하여 우리는 현존하게 된다. 또 실재를 보아야 그에 따른 바른 행위를 하게 된다. 현재에 고요하게 보다 오래 머물기를 권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틱낫한 스님도 같은 맥락의 가르침을 들려주신다.
“당신 아이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 풀밭에 나란히 앉아라. 함께 숨쉬고 함께 웃어라. 그것이 평화 수업이다. 당신이 여기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감상할 줄 안다면 다른 어떤 것을 찾지 않아도 될 것이다. 평화는 모든 순간, 모든 호흡, 모든 발걸음에 맛볼 수 있는 것.”
이 말씀도 우리가 있는 곳에서 조용하게 숨 쉬며 머물 것을 권하는 내용이다. 조용하게 머물 때 웃음과 평화가 찾아온다는 말씀이다. 숨을 쉬면서 가만히 머물 때 내가 꽃임을 알게 되고 신선함을 느끼게 된다는 말씀이다. 스님은 ‘웃음’을 함께 강조하신다. 웃음은 “입으로 하는 요가”라면서 웃음은 “친선사절”이라고도 하셨다. 참 멋진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웃음은 친선사절이니 내가 다른 대상이나 존재들에게 웃음을 건네면 곧이어 나도 웃음을 되돌려 받게 될 것이다.
나도 조용히 현재에 머물기 연습을 한다. 시선과 마음이 자주 다른 곳을 향해 흔들리고 흩어지지만 말이다. 가령 해가 질 때 거실에 가만히 앉는다. 해가 지면서 세계의 빛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본다. 환함에서 어둠으로 세계가 이동하는 것을 느낀다. 점점 해가 저물면서 내가 뚜렷하고 견고하다고 감각하고 인식하던 세계의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고 사라지는 것을 본다.
이 경험은 ‘묽다’라는 시를 통해서 표현하기도 했다.
“새가 전선 위에 앉아 있다/ 한 마리가 외롭고 움직임이 없다/ 어두워지고 있다 샘물이/ 들판에서 하늘로 검은 샘물이/ 흘러들어가고 있다/ 논에 못물이 들어가듯 흘러들어가/ 차고 어두운 물이/ 미지근하고 환한 물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물을/ 섞이면서 아주 더디게 밀고 있다/ 더 어두워지고 있다/ 환하고 어두운 것/ 차고 미지근한 것/ 그 경계는 바깥보다 안에 있어/ 뒤섞이고 허물어지고/ 밀고 밀렸다는 것은/ 한참 후에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도록 너무/ 늦지는 않아 벌써/ 새가 묽다”
이 시는 전선 위에 앉아 있는 한 마리 새의 형체가 묽어지는 것을 직접적으로 본 것이지만, 시간의 흐름을 물의 뒤섞임과 교체로 비유하고 또 대지와 우주의 온도가 점차 식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어두워지는 것을 보면서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은 하루에 쌓인 생활과 노동의 피로를 가시게 하고 마음의 평온을 안겨준다.
우리는 무엇에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다. 비가 온 후의 여름밤에는 물웅덩이에 맹꽁이가 와서 시끄럽게 우는 것을 들으면서 그 소리 위에 앉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소리는 더 이상 시끄럽지 않다. 오히려 생명의 생기와 환희를 느끼며 앉아 있을 수 있다. 나는 귤꽃이 필 때에는 귤꽃 향기가 밤의 검은 공간에 향기의 몸으로 하얗게 내 앉은 곳으로 전해오는 것을 느낀다. 바람이 많은 날에는 대나무들이 옆으로 기우뚱 밀렸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한참 바라본다. 바닷가에 가서 해조음을 듣는 시간도 내가 즐기는 시간이다. 파도는 푸른 돛배처럼 밀려오고, 흰 포말은 모래알을 적시며 사그라진다. 수평선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한다.
요즘엔 여름밤에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서 그 소리 위에 간단하게 앉는다. 이 때의 일은 아주 최근에 쓴 ‘여름밤’을 통해서 드러냈다.
“풀벌레가 운다// 오늘 이 밤에는/ 풀벌레 소리가/ 전경(全景)// 내 만면(滿面)에도/ 풀벌레 소리// 한 소리의/ 언덕/ 골짜기/ 한 소리의/ 여름밤// 돗자리로 펴놓고/ 모기장으로 쳐놓고// 거기에/ 빈 쭉정이 같은/ 내가/ 내 그림자가/ 일렁일렁한다”
이 시에서처럼 풀벌레 소리 위에 앉으면 그 소리는 평면처럼 평안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듣는 일이 아니라 바라보는 일처럼 되어 하나의 풍경이 된다. ‘전경(全景)’이라고 쓴 까닭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틱낫한 스님은 이 책에서 이런 말씀을 들려주신다.
“보통 사람들은 물 위나 희박한 공기 속에서 걷는 것을 기적으로 여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기적들 속에 있다. 푸른 하늘, 흰 구름, 아이 눈동자.”
우리가 순간순간 받는 이 시간을 천천히 호흡하고 웃으면서 또 그 속에 깃들어 있는 기적들을 발견하면서 살았으면 한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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