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달라이 라마의 책 <종교를 넘어>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삶의 물질적 측면에는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만 도덕 윤리나 내적 가치들은 가볍게 여기는 습성이 있습니다. 존자의 말씀대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실천과 노력이 이어진다면 지금 당장 눈에 띄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큰 힘이 되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지난 수십 년을 되돌아보니 기뻐할 이유가 많음을 깨닫게 됩니다. 의학 발전을 통해 치명적인 병들을 뿌리 뽑을 수 있었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가난에서 구제되어 현대교육과 의료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분야에서 일어난 엄청난 발전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고통은 여전히 존재하며, 계속해서 인류는 막대한 어려움과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풍요로운 지역의 사람들은 고도의 소비생활을 향유하고 있지만, 기본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수많은 사람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우리 인간이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에 무언가가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요? 내 생각에 근본적인 문제점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차원에서 삶의 외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에는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반면, 도덕윤리나 내적 가치는 무시한다는 점입니다.
삶에서 더 많은 인내와 관용을 발휘하게 만드는 고난이 사실은 우리를 더욱 강하고 튼튼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매일 경험하는 고난에서, 내면의 고요함을 잃지 않으면서 어려움을 더 잘 받아들이는 능력이 나옵니다. 물론 나는 삶의 방식으로서 고난을 옹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고난의 혜택을 바라봄으로써 그것을 건설적으로 대한다면 고난이 내면의 힘과 불굴의 용기를 가져올 수 있음을 단지 보여주고 싶을 뿐입니다. 하지만 삶의 일상적인 좌절은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8세기 인도 사상가 산티데바의 충고가 특히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해답이 있다면
낙담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해답이 없다면
낙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이것을 문제를 다루기 위한, ’필요도 없고 의미도 없는 접근법‘이라고 부릅니다. 문제에 해결책이 있다면 지나치게 걱정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압도당하는 듯 느끼기보다는 해결책에 이르기 위해 그저 단호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주의 깊게 생각한 뒤, 찾을 수 있는 해결책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면 걱정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교를 공부하게 되면서 그동안 나에게 ‘진정 원하는 나의 모습이 있었나?’하고 질문하며 나 자신을 하나하나 발견해 나가고 있습니다. 한 가지에만 치우치지 않는 기도와 봉사와 명상과 마음 수행을 통해서 나 스스로가 주변 이들에게 더 많은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