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년 동안 코로나19라는 터널만 벗어나면 눈부신 일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버텨왔다. 하지만 작금에 우리가 직면한 상황은 결코 녹녹치 않다. 자연재해는 물론이고 경제사정도 매우 우울하다. 환율은 연일 치솟고, 무역수지는 매월 적자를 갱신하고, 치솟는 물가에 서민들의 삶이 날로 고단해 지고 있다.
세상살이가 이렇게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고통이 사라진 유토피아를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지혜의 길을 추구하는 불교에서도 ‘극락(極樂)’이라는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신앙이 있다. 극락은 달리 ‘정토(淨土)’라고도 하는데 정신적 번뇌와 육체적 고통이 사라진 깨끗한 땅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정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정토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다는 ‘유심정토(唯心淨土)’와 서쪽으로 십만억 국토나 떨어진 곳에 있다는 ‘타방정토(他方淨土)’가 그것이다.
원효스님의 「무량수경종요」에 나타난 정토
타방정토를 달리 서방정토라고도 한다. 서쪽으로 아득히 먼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너무나 아득하고 멀어서 내 힘으로는 찾아갈 수 없는 곳이다. 여기서 아미타 내영(來迎) 신앙이 등장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아미타불이 오셔서 나를 인도해 간다는 것이다. 이처럼 서방정토는 아미타불의 힘을 빌려야만 갈 수 있기에 정토신앙을 타력신앙(他力信仰)으로 분류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누구나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믿음이 아닐 수 없다.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인간의 목숨은 유한한데 우리는 여기서 벗어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려운 교리를 몰라도 되고, 힘든 수행을 못하더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염불하기만 하면 영원한 행복의 세계로 간다니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그래서 정토신앙은 예로부터 대중적인 신앙으로 널리 신봉되어 왔다.
정토신앙의 이런 대중성 때문인지 원효스님도 「무량수경종요」 등 정토신앙에 대한 소를 남겼다. 여기서 스님은 정토에 대해 “그윽한 향기와 진리의 맛으로(珍香法味) 몸과 마음을 기르니 누군들 아침에 굶주리고 저녁에 목마른 괴로움을 받겠는가?”라고 했다. 정토에 태어난 사람들은 굶주리거나 목마른 고통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은 지상과 같은 음식을 많이 먹는 풍요가 아니라 그윽한 향기가 피어나는 진리로써 몸과 마음을 양육한다는 점이다. 이는 중생들이 고통 속에 사는 이유는 밥의 부족이 아니라 진리의 궁핍 때문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렇게 보면 극락세계는 진리로써 몸을 지탱하고, 목숨을 유지하는 곳이다. 진리의 세계는 나고 죽는 유위(有爲)의 세계가 아니므로 생로병사라는 고통이 없다. 원효스님은 정토에 간 사람들은 흰머리와 주름살과 영원히 이별하고, 온갖 근심과 삶의 고단함이 없다고 했다. 정토는 무한한 생명[無量壽]을 누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섭대승론』에서도 ‘정토는 한결같은 청정과 한결같은 즐거움과 한결같은 잃지 않음과 한결같은 자재(自在)’의 세계라고 했다. 번뇌와 욕망이 없어 마음이 언제나 깨끗하며, 슬픔과 괴로움 대신 즐거움만 있으며, 생로병사와 같은 상실의 고통이 없고,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는 자유를 누리는 세계라는 것이다.
중생의 근기에 따른 세 가지 왕생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정토에 태어날 수 있을까? 원효스님은 정토에 왕생하는 방법에 대해 사람의 근기를 상중하로 나누어 각기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먼저 ‘상근기 중생[上輩]’이 정토에 태어나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실천과 한 가지 원을 제시했다.
첫째, 집을 떠나 욕심을 버리고(捨家棄欲) 출가자가 되는 것이다. 출가만으로 왕생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정토로 갈 수 있는 방편(方便)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다(發菩提心). 최상의 깨달음은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바른 씨앗[正因]이 된다. 셋째, 오로지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인데(專念彼佛), 이는 정토에 왕생하기 위한 수행[觀]에 해당한다. 넷째, 모든 공덕을 짓는 것으로(作諸功德) 정토에 왕생하기 위한 실천[行]에 해당한다. 다섯째, 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는 것이다(願生彼國).
요약하자면 상근 중생이 정토에 왕생하려면 세속의 삶을 버리고 출가하여 수행의 조건[방편]을 갖추고, 보리심을 일으켜 정토에 대한 바른 씨앗을 심고, 염불수행과 함께 모든 공덕을 닦는 네 가지 실천행을 구비해야 한다. 그리고 정토에 왕생하겠다는 간절한 원을 일으켜야 한다.
다음으로 ‘중근기 중생[中輩]’이 정토로 가기 위해서는 첫째, 비록 출가는 못했더라도 위없는 보리심을 내야 한다.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이야말로 정토로 가는 바른 씨앗[正因]이기 때문이다. 둘째, 오로지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 약간의 선행을 닦는 것이다(多少修善). 염불이 수행이라면 선행의 실천은 공덕을 쌓는 것이다. 넷째,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중근기 중생은 비록 출가는 못하더라도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는 보리심은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을 생각하는 염불 수행과 약간의 선행을 실천하는 공덕이 요구된다. 나아가 정토에 왕생하겠다는 간절한 바람[願]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근기 중생[下輩]은 믿음이 없는 사람과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먼저 굳건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첫째, 모든 공덕을 다 짓지는 못하더라도 마땅히 위없는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둘째, 십념에 이르도록(乃至十念) 오로지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 저 국토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반면 깊은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깊고 깊은 법을 듣고 환희하며 믿고 기뻐하는 것이다(歡喜信樂). 둘째는 한 생각이라도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는 지극히 정성스런 마음[至誠心]으로 저 국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근 중생이 둘로 구분되는 지점은 믿음이 있고 없고의 문제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아미타불을 열 번 불러야 한다(必須十念). 하지만 믿음이 깊은 사람은 한 생각만이라도 아미타불을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원효의 정토관에 담긴 네 의미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서 원효스님을 향해 “부처님의 진리를 처음으로 빛나게 했다(初輝佛日).”고 평가했다. 원효스님도 스스로 자신을 새벽이라는 뜻에서 ‘원효(元曉)’라고 불렀고, 당시 신라 사람들도 원효스님을 ‘첫새벽[始旦]’이라 불렀다. 원효스님은 한국불교의 위대한 서막을 연 분이므로 그 위상에 걸맞은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원효스님도 정토신앙에 대해서 소(疎)를 지은 것은 정토신앙이 갖는 종교적 힘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무량수경종요」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 방법을 달리 제시한다는 점이다. 상근 중생에게는 다섯 가지의 엄격한 방법을 제시하지만 하근 중생에게는 간단한 방법만을 제시한다. 얼핏 보면 상근 중생의 정토왕생은 복잡하고 어려운 반면 하근 중생은 쉬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속에 담긴 의미는 상근 중생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기에 최상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고, 하근 중생은 그것밖에 감당이 안 되기 때문에 생긴 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토신앙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믿음조차 없는 하근 중생일지라도 열 번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정토에 갈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정토로 인도하겠다는 자비심의 표현이다. 진짜 정토의 행복이 필요한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중하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정토에 왕생하겠다고 원(願)을 세우는 것이다. 설사 아미타불의 본원력의 힘으로 정토로 간다고 할지라도 원하지 않는 사람은 데려갈 수 없는 법이다. ‘평양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정토가 아무리 좋아도 스스로 가겠다는 자발성이 없으면 갈 수 없다. 이런 가르침은 우리들의 삶에서도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원을 일상적 의미로 풀어보면 무엇을 이루겠다는 비전이나 목표에 해당한다. 우리들의 삶은 각자가 가진 비전과 목표에 의해 그 삶이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른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셋째는 원과 실천의 조화이다. 아무리 간절하게 왕생하겠다는 발원을 세워도 그것만으로 정토에 왕생할 수는 없다. 정토왕생이라는 꿈을 세웠다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구체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마음의 수행과 몸의 선행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정토왕생의 꿈은 한낱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 원효스님은 화쟁국사라는 칭호에 걸맞게 원과 실천의 조화를 강조하고 있다. 스님은 「발심수행장」에서 “앎과 실천을 함께 갖추는 것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行智俱備 如車二輪].”고 했다. 앎과 실천이 조화를 이루어야 튼실한 수레의 두 바퀴처럼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다 준다. 마찬가지로 정토에 왕생하겠다는 간절한 바램[願]과 정토에 왕생하기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실천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
넷째는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원효스님은 보리심이야말로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바른 씨앗[正因]’이라고 했다. 나아가 ‘예토와 정토가 본래 한마음(穢土淨國 本來一心)’이라고 했다. 이 말은 정토가 아득히 먼 서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토에 있어도 마음을 깨치면 이곳이 곧 정토라는 뜻도 된다.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면 굳이 아득한 서방세계로 가지 않아도 내가 머무는 이곳이 바로 정토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