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꺼내 읽고 있다. 이십대에 읽은 느낌이 지금 읽고 난 후의 소회와 같을 수는 없다. 그리고 대개 큰 차이가 난다. 좋은 책은 읽을 때마다 그 의미가 새롭다. 낡고 해진 시집을 다시 들춰보기도 하고 고전들을 다시 읽기도 한다.
‘중용’도 다시 보고 있다.
중용에 이런 문장이 있다.
“진실하고 성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람이 가야 할 길이다. 진실과 성실이 세상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다. 진실하고 성실하지 않으면 세상 만물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말씀은 딱히 ‘중용’ 아니더라도 누누이 들어온 것인데 왜 갑자기 이 문장이 무겁고 귀하게 여겨졌을까.
옛 책을 다시 읽으면서 효봉 스님에 관한 책을 또 함께 읽고 있는데, 스님의 법문에 이런 말씀이 있다.
“수면을 줄이고 공부 시간을 늘려라. 노력하는 것만큼 소득이 있다. 어려운 행을 능히 행하고,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아내는 것이 납자의 본분이다. 참고 또 참으면 조용히 성취가 돌아오는 법이다.”
이 가르침을 받아 안을 때에도 죽비 같은 것으로 등짝을 한 대 맞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조용히 성취가 돌아오는 법”이라는 말씀이 좋았다.
‘중용’의 문장을 읽을 때에나 효봉 스님의 법문을 접하고서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까닭은 아마도 누군가 내게 이렇게 질문하고 난 이후의 일이 아닐까 한다. 그이는 나를 찾아와서는 질문을 했다.
“이렇게 시골에 사는 일이 흡족한가요. 꾀하려는 일이 있는지요.”
좀체 들어보지 못했던, 나를 좀 당황스럽게 하는 질문이었다. 나는 즉답을 할 수 없어서 “글쎄요. 그런 생각을 미처 품어보지 못했네요.”라고 얼버무렸다.
그러곤 그이와 헤어진 후로 곰곰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보았다. 그이의 물음은 의미심장한 물음이었다.
나는 귤 창고처럼 지은 집에서, 시골 마을에서 사는 일에 만족하고 있는가. 또 무엇을 꾀하려고 하는가. 단층으로 기다랗게 지은 집에 사는 것에 나는 대체로 만족하고 있는 듯하다. 귤밭 한가운데에 지은 집이라고 해도 무방할 내 집은 생활하는 데에 큰 불편함이 없기도 하다. 이 집에 살게 된 때부터는 새 옷을 사는 일도 드물어졌고, 꼭 필요하지 않으면 물건을 새로 사는 일도 예전에 비해 훨씬 줄어들었다.
나는 최근에 졸시 ‘귤밭집’에서 이렇게 썼다.
“밭에 집을 짓고 사는 그이는 한 가지 옷을 입고 살아 천의 색이 다 바랬네
오래 입고 입어 이제 옷은 빛깔이 없네”
사실 이 시구들은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담고 있지 않은가 싶다. 화려한 것에 대한 관심과 소유욕이 거의 사라졌다. 나는 작은 귤밭을 가꾸면서, 나만의 색채를 두드러지게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조용하게 또 은은하게 풀이나 땅의 빛깔처럼 자연에 스며들어 살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내가 꾀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노동하면서 틈틈이 시를 짓는 일이 아니냐고 나는 자문자답했다. 이보다 좀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농사일을 좀 더 잘 아는, 그럴법한 농부가 되는 것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과수와 화훼의 일에 능숙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이보다 좀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작은 포클레인을 다룰 수 있도록 교육을 받고, 필요할 때에 영농기계지원센터에서 작은 포클레인을 하루 이틀씩 빌려서 밭을 일구는 일이 아닐까, 라고 내게 되물어보았다. 물론 작은 포클레인은 다시 돌려줘야 하겠지만. 메밀과 유채, 보리도 좀 가꿔봤으면 좋겠다고 더 큰 욕심을 내보기도 했다.
그런데, ‘중용’과 효봉 스님의 법문을 대하면서 하나의 덕목이 추가 되었다. 시간을 잘 활용하는 일이 내가 꾀하는 것의 목록에 포함 되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 추가되었다. 농사는 몸을 고되게만 하는 그런 노동에 그치지 않는다. 물론 수확을 기대하지만 농사 일 자체는 생명세계를 가꾸는 일인 까닭이다. 생명세계를 가꾸면서 나도 생명세계의 일원임을 깨닫는 일인 까닭이다.
“땅은 흙이 쌓인 것이지만 넓고 두텁다. 큰 산을 싣고서도 무겁다 여기지 않고 강과 바다가 그 위로 흐르지만 물 한 방울이 새지 않으며 만물을 품는다. 산은 돌이 쌓인 것이지만 넓고 크다. 그 안에 나무와 풀이 자라고 날짐승과 들짐승이 살며 진귀한 보물을 품고 있다.”
이 문장도 ‘중용’에 실려 있는 것이다.
생명세계를 가꾸는 일은 만물과의 화평을 일구는 것이요, 우선적으로 내 마음의 화평을 일구는 일에 해당한다. 시골에 살면서 생명세계를 가꾸다보면 악한 일은 하지 않게 되고, 선한 일을 보다 더 많이 하게 된다. 화초든 작물이든 동물이든 기르는 일은 해치는 일이 아니요, 돕는 일만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열심히 배우고, 성실하게 애쓰며, 다른 생명을 내 생명처럼 진실하게 대하도록 성심을 다할 뿐이다.
계절이 벌써 늦가을을 향해 가고 있지만 땅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성심껏 한 만큼 깨달음도 깊어질 것이니, 시골에 사는 내게 툭 던진 그이의 질문 덕택에 내 시야가 열리게 된 셈이다. 효봉 스님의 말씀처럼 묵묵하게 하다 보면 조용한 성취도 뒤따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