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나한_역사 속에 실존한 부처님의 제자
‘나한’이란 ‘아라한’의 약칭으로 범어 아라하트(arahat)의 음역이다. ‘세상의 공양과 존경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는 자’라는 의미에서 ‘응공(應供)’이라고도 한다. 아라한은 부파불교 당시에는 부처님을 가리키는 명칭이기도 하였다, 이후 부처님의 제자가 도달하는 최고의 경지를 의미하게 되면서 부처님과 구별하여 쓰이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의 아라한은 십육나한, 오백나한이 역사적 실존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오백나한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에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 동진(東晋,397년)의 승가제바(僧伽提婆)가 번역한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Ekottaragama)』이나 서기 404~409년에 구마라집이 한역한 『십송률(十誦律)』에 의하면 부처님이 중인도 교살라국의 사위성에서 500명의 나한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매월 16일 부처님께서 오백나한을 위한 계를 설하였다고도 전하고 있다. 또 『법화경』의 「오백제자수기품」에서는 부처님이 오백 명의 나한에게 수기를 베푸는 내용이 나오며, 『오분율』에는 석존이 열반한 직후 중인도 마가다 국의 수도 왕사성에 있는 칠엽굴에서 오백 명의 나한이 결집하여 불전을 편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오백나한에 대한 가장 실증적인 역사는 석존 입멸 후 마가다 국의 왕사성 외곽 칠엽굴에서 가졌던 제1차 결집이다. 이 결집은 가섭존자의 주재 아래 진행되었다. 다문제일인 아난존자가 석존의 가르침인 경을 암송하고 지계제일인 우바리존자가 석존이 말씀하신 승가의 규범인 율을 암송하면 오백 명의 비구 대중들이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경과 율을 결집한 모임이다. 아난다는 석존을 가까이서 봉양한 시봉자로 오랫동안 석존 곁에서 설법을 가장 정확하게 들은 제자이다. 그는 “나는 이와같이 들었나니(여시아문)”라는 말을 서두로 낭독했다. 그의 낭독을 들은 오백 명의 제자는 이렇게 낭독된 교법을 확인한 후 모두 함께 합송했다. 율의 결집도 마찬가지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율은 가장 율을 잘 지켰다고 하는 지계제일의 우바리가 암송해 낸 것을 참가자 전원이 합송해서 결정했다. 이것은 곧 석존의 교법과 율의 편찬으로 다른 말로는 ‘결집(상기티)’이라고 한다. 이것이 석존 입멸 후 최초의 결집이며 오백 명이 참여했다고 하여 오백 결집이라고 하며 이때 참가한 오백 명의 제자를 오백나한이라 한다.
석존 생존 시 제자들은 석존의 설법을 귀로 듣고 마음속에 암기해 두는 것이 전부였으며,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던 것은 아니었다. 제1차 결집 때 비로소 오백 명의 제자들이 부처님의 교법을 암기하기 쉽도록 운율이 있는 시 형식으로 정리하였던 것이다.
오백나한은 석가모니 부처님 재세 시 역사적으로 실재한 부처님의 제자이며, 석존께서 수기를 내려 앞으로 부처님이 되기로 예정된 제자들이며, 석가모니 부처님 입멸 후 그의 말씀을 전한 증언자들이라 할 수 있다.
설법하는 석가모니부처님과 경배하는 십대제자, 십육나한들
‘나한신앙’,
‘세상의 공양과 존경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는 자’에게 기대는 바램
중국에서의 나한 신앙은 당나라 때 성행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에 크게 흥성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된 나한은 실존하지 않는 공상적인 존재이다. 즉, 역사적 실존 인물보다는 ‘세상의 공양과 존경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는 자’라는 의미의 ‘나한’을 신앙한 것이다. 때문에, 역사적 존재로서의 오백나한을 포함하여 불교의 동전(東傳) 과정에서 해당 지역의 고승도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오백나한은 인도로부터 기원하지만 오백나한도의 조성과 나한 신앙은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중국에서 나한은 무병장수와 부귀영화를 보장해 주고 신통력을 발휘하는 영험 있는 존재로 인식되었고 나한재 등의 의식을 올리며 신앙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시대에 나한재를 많이 개최하였는데 그 목적도 대체로 나한의 신통력을 빌어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고려 시대의 나한재는 전란이 예견될 때마다 열리는 등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하는 목적이 컸다. 그 외에 가뭄에 비가 내리기를 빌거나 국왕의 장수를 빌기 위한 나한재도 개설되었다.
고려 <오백나한도>,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불화
중국에서 나한상은 남북조 시대부터 그려지기 시작하여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상당히 많은 수의 나한도가 그려졌다. 우리나라는 고려 1281년 집필된 『삼국유사』 3권과 조선 1449년 집필된 『고려사』 1권에 고려 건국 초기인 태조 6년(923)에 중국 후량에 간 사신 윤질(尹質)이 오백나한의 화상을 가져와 황해도 해주의 숭산사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을 비롯하여 고려 시대 나한 신앙의 중심 사찰인 도성 내의 보제사는 오백나한을 봉안한 나한당을 갖추고 나한재를 빈번하게 개최했다고 기록이 남아 있는 등 나한도 조성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오백나한은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 직후 왕사성의 칠엽굴에서 진행된 1차 결집 때 불전을 편찬한 제자들이다. 이들을 모신 전각을 오백나한전 또는 오백성중전이라고 부르고 상과 그림을 봉안하여 예배한다. 현존하는 오백나한도는 오백나한을 각각 한 폭씩 그리거나 한 폭에 여러 명의 나한을 그려 100폭이나 50폭에 500명의 나한을 나누어 그린 것과 1폭에 500명의 나한을 모두 그린 형식이 있다.
고려 말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지온인 소장 <오백나한도>는 1폭에 석가삼존을 중심으로 500명의 나한을 모두 그렸다. 한 폭에 석가삼존과 오백나한을 그린 그림은 조선 시대는 물론 중국, 일본, 즉 동아시아 불화에서는 현존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귀중한 유산이나 일본에 소재하고 있어 안타깝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상의 원류를 살필 수 있는 기록이 있어 주목되는데, 이 불화를 소장했던 일본 지온인 사찰의 주지 우가이테츠죠(1814-1892)가 지온인에 이 불화를 기증하며 이를 고증한 『나한도찬집』을 출판했다. 테츠쵸의 기록에 의하면 중국 북송대 진관(1049~1100)이 1079년 저술한 『회해집』의 「오백나한도기」에 화승 법능이 조성한 <오백나한도> 작례에 대해 기술한 내용과 고려 시대 조성된 <오백나한도>가 도상이 일치함을 발견하였다. 진관의 기록이 지온인 소장 <오백나한도>를 지칭한다고 할 수는 없으나 진관이 서술한 내용과 이 불화의 도상이 유사하여 영향 관계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지온인 소장 고려 <오백나한도>는 일본에서 이를 모본으로 하는 판화가 제작되었는데 고려 <오백나한도>와 화면 크기가 같고 도상의 구성과 내용도 동일하다. 이 판화를 제작한 사람과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테츠쵸에 의해 19세기 말경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 <오백나한도>는 장엄한 산수를 배경으로 석가삼존과 십대제자, 그리고 십육나한과 오백 명의 나한이 배치되어 있다. 이 불화에 묘사된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산수는 불화 구성상 가장 특징적인 요소 중 하나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산수 표현은 북송대의 산수화풍과 유사하여 이상적 산수화를 통해 자연 속에서 심성을 수양하고 즐기려 하였던 북송대 곽희의 산수풍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불화에는 나한이 용이나 봉황, 호랑이를 타고 있거나 사슴이나 염소 등 동물들과 함께하는 신묘한 장면이 등장하고, 계곡물에 발을 씻거나 빨래를 하고 발우를 닦는 소소한 일상의 모습이 등장하기도 한다. 인공물 없는 웅장한 산수 곳곳에 자리 잡은 이러한 나한들의 모습을 보면 순수 자연과 벗 삼아 속세를 초탈한 유유자적한 나한의 성품과 삶을 생각하게 하고, 당시 사람들이 오백나한에 대해 가졌던 관념과 바람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산수 안에 표현된 석가모니 부처님과 오백나한의 모습은 석존 재세 시, 인도 영축산에서 설법하고 있는 석존과 그의 오백 제자를 연상하게도 한다. 특히, 곽희풍의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산수화풍 속에 묘사된 나한의 유유자적한 모습들과 중첩되며 부처님과 나한의 정토 세계가 눈앞에 나타난 듯하다.
이 불화를 바라보고 있자니 고려 시대 나한을 열렬히 숭상한 그들의 신앙심에 화답하기 위해 나한 정토를 표현하려고 온 힘을 다하여 불화를 조성하였을 작가의 열정과 깊은 의도를 헤아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