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 위패를 모신 어실각과 향나무
영조 임금의 효심이 깃든 절,
고령산 보광사
됫박만큼 가파른 됫박고개를 굽이굽이 자동차로 넘어서도 보광사 부처님을 친견하기까지는 경사진 고갯길을 한참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고령산(622미터)은 그다지 높진 않으나 기운이 신령스럽고 풍광이 뛰어나 파주의 한계령, 파주의 소금강이라 불리는데, 산 입구의 널찍하게 잘 닦아놓은 포장길이 오히려 고즈넉한 정취를 방해한다. 곱기로 소문난 보광사 단풍이 아직은 철이 일러 아쉬워할 때쯤 해탈문이 나오고, 왼쪽 기슭에서 부도전도 모습을 드러낸다.
고령산 보광사는 서기 894년(진성여왕 8) 도선 국사가 왕명을 받고 ‘고령사’라는 절을 지음으로써 비로소 ‘긴 역사’가 시작되었다. 긴 역사라 하는 까닭은 보광사가 유난히 중수와 재건 등의 과정을 여러 번 거쳤기 때문이다.
고려 때인 1215년(고종 2)에는 원진 국사가 중창했는데, 이때 법민 대사가 대웅전에 목조석가삼존불좌상과 두 기의 협시불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1388년(우왕 14)에는 무학 대사가 중창했으며, 임진왜란 때 여러 전각들이 소실되자 1622년(광해군 4) 설미, 덕인 두 스님이 대웅전과 도솔암을 창건한다. 이어 1634년(인조 12) 범종각을 세우고 1667년(헌종 8) 지간, 석련 스님이 대웅보전과 관음전 등을 재건한다.
1740년(영조 16)에는 대웅보전과 광응전을 중수하고, 만세루를 새로 지었다. 대웅보전의 현판 글씨를 영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광사는 조선 21대 임금 영조와 인연이 깊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1670~1718)의 무덤인 소령묘가 고령사 팔일봉에 있었는데, 1753년(영조 29) 영조가 이를 ‘소령원(昭寧院)’으로 높이면서 가까운 절 고령사를 ‘보광사’로 바꾸고 소령원의 능침사찰로 삼았다.
영조는 보광사에 어실각(御室閣)을 지어 어머니 위패를 모시고, 그 옆에 향나무를 심었다. 보광사가 효 근본도량으로 불리는 까닭이 이 어실각에 있다. 어실각은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왼쪽의 위쪽에 자리 잡은 채, 300여 년 전 그 향나무의 은은한 향내와 함께 어머니에 대한 영조의 그리움과 효심을 애잔하게 전하고 있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TV 드라마 〈동이〉의 실존인물인 숙빈 최씨는 살아생전과 달리 죽은 뒤에는 묻힐 곳을 찾지 못하는 서러움을 겪었다. 그 때문에 영조의 사모곡이 더 애틋하고 절절했는지 모른다.
한편 숙빈 최씨는 생전에 담양 용구사를 용흥사(龍興寺)로 고치는 등, 연잉군인 아들이 왕이 되기를 빌었다고 한다. 그 기도가 성취되어 영조는 왕위에 올라 52년간 나라를 다스렸고, 83세까지 천수를 누려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
영조 이후에도 불사는 계속되어 1863년(철종 14) 나한전, 수구암 등이 창건되었고, 1898년(광무 2)에는 인파 스님이 상궁 천씨 등의 보시를 받아 대웅보전과 만세루를 중수했다. 현재 대웅보전에는 이때 조성된 불화가 여러 점 남아 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의 결정체
보광사 대웅보전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보광사 대웅보전(경기도유형문화재 제83호)을 보면서 떠오른 말이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백제본기〉에 온조왕 15년(BC 4년)에 지어진 궁궐을 보고 남긴 말이라고 한다. 백제 예술의 진수를 표현한 말인데, 유홍준 교수가 인용해서 일반에 널리 알려졌다.
보광사 대웅보전은 한 마디로 ‘아름답다’. 퇴색한 단청이 무채색으로 소박하지만 결코 누추하지 않고, 정교하게 조각된 공포나 내부 천장의 별지화(別紙畵), 외벽의 목판화 등에서는 화려함보다는 고풍스런 멋이 느껴진다. 배흘림기둥과 우물천장도 보는 이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영조가 직접 쓴 ‘갑자중추 옥간서(甲子中秋 玉澗書)’라는 편액을 비롯해서 대웅보전 안팎에는 성보문화재가 그득하다. 주존불인 목조석가여래삼불이 좌상이고 협시불인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입상인 점도 특이하다. 주존불과 두 협시불(목조보살입상)은 양식과 기법이 서로 다른데, 좌우 협시불만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48호로 지정받았다. 좌 협시불 복장에서 나온 조성발원문을 통해 두 협시불이 폐사된 양주 회암사에서 옮겨왔으며, 1633년(인조 11)에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이 밖에 1634년(인조 12) 조성된 ‘숭정칠년명동종(崇禎七年銘銅鐘)’(경기도유형문화재 제158호) 실물을 비롯해서 2018년에 경기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영산회상도(제219호), 지장시왕도(제320호), 현왕도(제321호) 등의 불화 5점이 대웅전에 남아 있다. 이 불화들에는 ‘光緖 十七年 庚寅臘月’ 또는 ‘大韓光武二年’ 등의 글씨가 있어 조성 연도를 알 수 있다. 다만 광서 17년이 신묘년인데 경인년이라고 적은 점이 궁금증을 갖게 한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는 삼태극 문양의 왕실 발원 금고(金鼓)도 호기심을 일으킨다.
대웅보전의 외벽은 흙벽이나 회벽이 아니라 판벽으로, 목판에 벽화를 그려 넣어 무척 이채롭다. 놀랍게도 이 판벽화는 흙벽이나 회벽에 그린 것보다 수명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남쪽면의 ‘위태천도’ 등 외벽 세 면에 총 10점이 남아 있다.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이 벽화들 중 뒷면 동쪽 판벽의 〈연화화생도〉 등은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그림이다.
만세루 툇마루의 목어
만세루는 정면 아홉 칸의 건물로 본디 승방이 딸린 누각으로 지었다고 한다. 여러 번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데, 그 툇마루에 걸려 있는 목어가 좀 생경하면서도 어쩐지 보광사 이미지에 잘 맞는 듯,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빛이 다 바랜 몸의 길이가 약 290센티미터, 몸통의 두께는 70센티미터 정도이다. 머리는 용의 형상이고 몸은 물고기를 본따 머리에 비해 날렵한 편이다. 제법 유명해져서 소설가 이외수 씨의 산문집 《하악하악》의 표지에도 등장했다.
수각 뒤쪽 계단을 올라가면 1981년 건립된 호국대불이 보광사 경내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이 호국대불(높이 12.5미터)에는 부처님 진신사리 11과와 법화경, 아미타경 등 각종 경전이 봉안되어 있다. 호국대불에 참배하고 내려오는 길, 어실각 위쪽 전나무숲 쉼터에 앉아 산사의 가을 정취에 흠뻑 빠져본다면 보광사 순례의 정수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마애이불입상 우뚝 서 있는
용암사(龍巖寺)
용암사는 광탄면 정지산 기슭에 있는 고려시대 사찰이다. 이 사찰은 한동안 쌍석불사로도 불렸는데, 보물 제93호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을 연고로 창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애이불입상의 조성시기에 따라 용암사의 창건 시기가 좌우된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磨崖二佛立像)은 거대한 천연 바위에 새겨진 두 기의 입상이다. 이 마애불의 조성 시기에 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먼저 고려 선종(재위 1083~1094) 때의 일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후궁인 원신궁주가 왕자를 낳기 위해 애를 썼는데, 하루는 꿈에 두 명의 도승이 나타나 “장지산 남쪽 기슭의 바위틈에 사는 사람인데, 배가 고프니 먹을 것 좀 달라”라고 말했다. 원신궁주가 선종에게 꿈 얘기를 전하자, 왕이 장지산으로 사람을 보내 그곳에 두 개의 큰 바위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선종이 그 바위에 두 기의 마애불을 새기라고 명을 내렸고, 그 마애불에 치성을 드리고 나서 원신궁주가 왕자 한산후 윤을 낳았다고 한다. 실제로 선종과 원신궁주 사이에는 한산후라는 왕자가 있으니, 전설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또한 마애불 양식의 특징과 제작 방식 등이 고려시대 마애불과 같다는 것도 고려시대 조성설의 근거가 된다.
조선시대로 보는 근거는 이 마애불 불상 아래 세 군데의 명문(1995년 발견) 때문이다. ‘성화(成化) 7년’, 즉 1471년(성종 2)이라는 연대와 함양군(咸陽郡) 등 왕실 종친, 화주 혜심 등 스님과 관료 등 시주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리고 명문 뒷부분에는 세조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구절이 있다. 하지만 고려 때 조성된 마애불에 추후에 글자를 새겨 넣었다는 추측도 설득력이 있다.
지친 길손들 위로해준 등대 같은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78번 국도를 지나가다 보면 용암사와 마애이불입상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보인다.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용암사와 연결된 주차장이 나온다. 하지만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먼 곳에서 우뚝 선 마애불 한 쌍이 눈에 더 잘 띈다. 먼길 오가는 길손들에게는 이 마애불이 이정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높이 17.4미터, 얼굴 크기만 2.3미터에 달하는 이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석불로 알려져 있다. 신체 비율의 부조화와 조각 솜씨가 정교하지 못하다는 평가로 귀한 대접을 받진 못하지만, 토속적인 얼굴 생김새와 투박한 표정이 오히려 정겹게 느껴진다.
천연 암벽의 자연미를 최대한 살려서 마애불의 몸통을 조각했고, 머리와 보개 부분은 따로 조각해서 올려놓았다. 이를 병립형 석불상이라고 한다. 바위가 튀어나온 부분을 활용해서 연꽃 줄기를 잡으려고 팔을 들어올린 것처럼 조각하는 등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이 마애불에 대해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남긴 글을 보면, 대부분 혜음령을 넘으면서 멀리서 마애불을 보고 적은 시들이다. 높은 곳에서 굽어보고 있는 마애불의 모습이 지친 길손들에게는 아마 긴 항해 중에 만난 등대의 불빛처럼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용암사 일주문을 거쳐 일직선으로 쭉 닦인 길을 올라가면 범종각과 대웅전이 나온다. 현존하는 용암사는 1936년 옛터에 중창한 것이다. 대웅전은 1979년 지은 건물이 불에 타서 2004년 새로 지었다. 앞마당에는 불국사 다보탑을 모방한 큰 탑이 어색하게 서 있고, 정면 3칸, 옆면 2칸의 대웅전은 소박한 규모에 비해 삼존불의 모습이 화려하고 섬세하다.
마애이불입상은 급격히 경사진 길을 올라가서 좁게 자리 잡은 가파른 언덕 위에 용암사를 굽어보며 서 있다. 마애불 앞 공간이 넉넉지 않은 데다 거대한 크기의 부처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심하게 뒤로 꺾어야만 가능하다. 아래쪽 울타리에 바짝 붙어서서 한껏 고개를 젖혀도 두 부처님을 한눈에 보기가 싶지 않다.
하지만 풍채가 좋아 이목구비와 옷의 주름, 손 모양 등이 큼직하고 뚜렷하다. 목청 큰 소리로 시원하게 맞이해줄 것만 같은데, 각각 둥근 돌갓과 네모난 돌갓을 쓰고 있다. 둥근 갓에다 연꽃을 든, 키가 좀더 큰 불상이 남성, 합장을 하고 네모난 돌갓을 쓴 불상을 여성이라고 보기도 한다. 민간에서는 두 남녀 미륵불이 나란히 서서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 돌갓을 불교에서는 ‘보개(寶蓋)’라고 부르는데, 보개를 쓴 불상이 전국에 80여 구 정도 있다고 한다.
용암사 미륵전과 삼성각 옆에는 1954년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세운 칠층석탑과 동자상이 서 있다. 어머니가 용암사 석불에 기도해서 낳았다는 이 대통령이 용암사를 방문해서 보시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의 하야와 함께 우여곡절을 겪은 동자상과 칠층석탑에도 지난한 세월의 이끼가 푸르게 끼여 있다.
‘암벽이나 구릉에 새긴 불상 또는 동굴을 뚫고 그 안에 조각한 불상’이란 뜻의 마애불, 미애불을 조각하는 것이 고행의 실천이듯, 이 가을에 바위를 갈고 닦는 마음으로 산사 순례를 떠나보자.